'죽음의 굿판' 칼럼으로 진보진영과 사이 틀어져…2018년 절필 선언 1년여 투병 끝에 8일 별세한 김지하 시인은 유신 독재 시절인 1970년대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저항 운동의 중심에 섰던 민족문학 진영의 대표 문인으로 평가받는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학생운동에 나선 한 고인은 1964년 대일 굴욕외교 반대 투쟁으로 불리는 '6·3 항쟁'에 참가했다가 수감돼 4개월간 첫 옥고를 치렀다.
1969년 시 '황톳길'로 등단한 후 1970년 풍자시 '오적(五賊)'으로 구속되는 필화를 겪었다.
1974년에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붙잡혀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가 풀려나면서 반체제 저항 시인으로 불렸다.
저항시의 상징인 '타는 목마름으로'(1975년)는 그의 대표작이다.
'민주주의여 만세'를 외친 이 작품은 군부 독재에 맞서다 여러 차례 옥살이를 한 고인의 저항 정신이 담겼다.
1980년대 가수 김광석 등이 이 시에 곡을 붙여 노래로 만들어 민주화를 요구하는 집회에서 자주 불렸다.
고인이 옥중에서 쓴 '양심선언'은 우여곡절 끝에 1975년 일본에서 발표돼 화제가 됐다.
고인은 교도관과 조영래 변호사 등의 도움을 받아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이 조작됐다는 내용의 양심 선언문을 작성한 뒤 교도소 밖으로 반출했다.
이 선언문은 고인의 산문집 '남녘땅 뱃노래'(1985년)에 수록돼 있다.
고인은 만해문학상,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회의 로터스 특별상, 정지용문학상, 만해대상, 국제시인회의 위대한 시인상 등을 받았다.
노벨문학상·노벨평화상 후보에도 올랐지만 수상에는 이르지 못했다.
수배와 도피, 구속, 고문 등 8년간 각종 고초를 겪은 고인은 1980년 석방된 후 동서양의 철학과 한국의 전통 사상을 아우르는 '생명 사상'을 제창했다.
고인은 수감 중 수많은 책을 읽으며 삶과 죽음에 관해 고민하는 과정을 통해 생명 사상을 깨우쳤다고 생전에 고백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사이비 종교에 빠진 게 아니냐는 시선도 있었다.
고인이 1991년 5월 조선일보에 쓴 칼럼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엄청난 논란을 일으켰다.
1990년대 들어 각종 발언 등에서 보수적 성향을 보이자 진보 진영에서 비판이 나오는 상황에서 이 칼럼은 고인의 이미지를 '변절자'로 만드는 시발점이 됐다.
당시는 명지대생 강경대 씨가 경찰에 맞아 숨지자 이에 항의하는 분신자살이 잇따르던 시절이었다.
고인은 생명사상을 강조하면서 목숨을 버리는 민주화 시위를 '저주의 굿판'에 비유했다.
고인은 칼럼에서 "자살은 전염한다.
당신들은 지금 전염을 부채질하고 있다.
열사 호칭과 대규모 장례식으로 연약한 영혼에 대해 끊임없이 죽음을 유혹하는 암시를 보내고 있다"며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 소름 끼치는 의사 굿을 당장 걷어치워라"라고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고인은 진보 진영과도 적대 관계를 갖게 됐다.
10년 뒤 '실천문학' 여름호 대담에서 칼럼과 관련해 "돌아가신 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쓰리고, 젊은이들 가슴에 아픈 상처를 준 것 같아 할 말이 없다"며 해명과 사과를 했지만 논란은 가시지 않았다.
고인은 2012년에도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 후보를 공개 지지하고 진보 문학평론가인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를 노골적으로 매도했다.
이후 언론 인터뷰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지한 건 잘못된 판단이었다며 다시 입장을 바꿨다.
2014년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서도 고인이 '김지하 시인의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등 세월호 유족과 시민단체들을 비판하는 3건의 글을 썼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에 고인은 자신이 쓴 글이 아니며 관련 게시글 유포자나 단체에 법적 대응을 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논란이 가라앉았다.
고인은 2018년 7월 등단 50주년 기념 시집 '흰 그늘'과 산문집 '우주생명학'을 출간하면서 더는 집필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출판사 측은 "김 시인이 생전에 펴내는 마지막 저서"라고 설명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