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두만강 국경 쟁탈전 1881-1919'
"두만강 북쪽 간도는 근대 한·중·일 투쟁의 장이었다"
조선과 청은 1712년 국경을 획정하기 위해 백두산에 비석을 세웠다.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는 서쪽은 압록, 동쪽은 토문(土門)을 경계로 삼도록 했다.

문제는 압록강과 달리 토문강이 시작되는 곳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토문강이 두만강인지도 불분명했다.

한동안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던 조선과 청의 국경 갈등은 1880년대 이르러 재점화됐다.

조선 사람들이 두만강 북쪽에 진출해 농사를 짓자 청이 대응에 나선 것이다.

역사학자인 쑹녠선(宋念申) 중국 칭화대 교수는 신간 '두만강 국경 쟁탈전 1881-1919'에서 근대에 두만강을 둘러싸고 펼쳐진 한·중·일 동아시아 삼국의 분쟁을 분석한다.

한국에서는 간도, 중국에서는 연변(延邊)이라고 한 두만강 북쪽 지역은 100여 년 전 각국 이익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미묘한 곳이었다.

조선과 청은 물론 대륙 진출을 노린 일본과 부동항 블라디보스토크를 확보한 러시아까지 얽혀 있었다.

청과 조선은 1880년대 국경회담을 열었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했고, 1897년 태동한 대한제국은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임명해 간도 소유권을 주장했다.

하지만 일본은 1909년 철도 부설과 탄광 개발 등에 관한 권리를 얻는 대신 간도를 청에 넘기는 간도협약을 체결했다.

이처럼 두만강 경계 획정 역사를 추적한 저자는 이 과정을 단순히 '국경을 정하는 것'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다.

간도 주민은 다수가 조선 출신이었다.

19세기 후반에는 함경도에서 이주한 사람이 많았으나, 1910년대 말에는 한반도 남부에서도 적지 않게 건너갔다.

1940년대 초 간도에 거주하는 한국인 인구는 63만 명을 넘었다.

저자는 이곳에 살았던 한국인들이 강한 한국을 재건한다는 이상을 버리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또 일본은 간도를 제국주의 도약판으로 삼고자 했고, 중국은 동북 3성의 본보기로 간주했다고 말한다.

이어 중국은 '내지화', 일본은 '식민화', 한국은 '독립'이라는 각기 다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간도에서 보이지 않는 투쟁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국민·국경·국가·영토라는 개념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생겨났다고 짚는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넓지도 않은 변경지대에서 발생한 충돌과 담판, 타협에는 심각한 지구사·지역사적 의의가 담겨 있다"며 한·중·일 삼국 모두가 간도에서 국가와 국민을 완전히 새롭게 정의하기 시작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국가가 국경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국경이 국가를 만들어냈다"며 "오늘날 통용되는 '영토국가', '민족국가'의 형태는 매우 새로운 것이며, 결코 고대부터 현재까지 일괄적으로 적용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너머북스. 이지영·이원중 옮김. 464쪽. 2만8천원.
"두만강 북쪽 간도는 근대 한·중·일 투쟁의 장이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