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작·연출가 겸 배우인 김명곤이 4~8일 국립극장 해오름에서 공연하는 창극 ‘춘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병언 기자
극작·연출가 겸 배우인 김명곤이 4~8일 국립극장 해오름에서 공연하는 창극 ‘춘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병언 기자
국립창극단 공연에서 배우들이 창(唱)을 할 때면 어김없이 한글과 영어 자막이 뜬다. 관객들이 노래의 의미를 온전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다. 재미있는 건 많은 관객이 한글이 아닌 영어 자막을 본다는 것이다. 한자와 고어(古語), 사투리가 그대로 쓰인 탓에 한글 자막만으론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힘들어서다.

2020년 5월 국립극장 달오름에서 초연한 김명곤 대본·연출의 창극 ‘춘향’은 달랐다. 사랑가, 이별가, 옥중가, 어사출도 등 오페라의 아리아와 비슷한 ‘눈대목’의 노랫말이 귀에 쏙쏙 박혀 굳이 자막을 볼 필요가 없었다. 김명곤이 판소리 원전을 쉬운 우리말로 옮기면서도 소리의 맛을 제대로 살려낸 덕분이다.

김명곤이 쉬운 노랫말로 다시 쓴 ‘춘향’이 2년 만에 다시 관객 앞에 선다. 날짜는 4~8일, 무대는 국립극장 해오름이다. 공연장을 512석 중극장에서 1221석 대극장으로 옮기고, 공연시간도 20분(120분→140분) 늘렸다.

3일 국립극장 연습실에서 만난 김명곤은 “관객에게 노래의 감정이 잘 전달될 수 있도록 가사의 말 하나, 토씨 하나 세밀하게 고쳤다”고 말했다. 극작가·연출가 겸 배우인 김명곤은 ‘소리꾼’으로도 유명하다. 명창 박초월(1917~1983)에게 10년 동안 소리를 배웠다. 1993년 개봉한 영화 ‘서편제’의 시나리오를 쓰고, 소리꾼 ‘유봉’ 역도 맡았다.
2020년 5월 국립극장 달오름에서 초연한 창극 ‘춘향’.  국립극장 제공
2020년 5월 국립극장 달오름에서 초연한 창극 ‘춘향’. 국립극장 제공
“스승님(박초월)으로부터 춘향가 중 사랑가를 배울 때였어요. ‘도련님은 훌륭 대장~’ 하시는 데 의미를 알 수 없어 여쭤보니 그냥 ‘훌륭한 대장으로 알아둬’라는 거예요. 나중에 알아보니 ‘흉중대략(胸中大略)’, 즉 ‘가슴 속 품은 커다란 뜻’이란 의미였죠. 판소리 판본 중엔 지금도 해석이 안 되는 말이 많습니다.”

그는 ‘춘향’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1998년 국립창극단의 6시간짜리 완판 장막 창극 춘향전의 대본을 썼고, 2000년 개봉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춘향뎐’ 시나리오도 맡았다. 국립창극단으로부터 작품 제안을 받은 건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2019년이었다. 그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이 “요즘 젊은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현대적 감각의 ‘춘향전’을 만들어보자”였단다.

“춘향전은 감정 위주의 드라마예요. 청춘남녀의 사랑과 열정, 슬픔 등이 어려운 가사 때문에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곤란하죠. 젊은 세대가 알아듣지 못 하는 말이 한마디도 없도록 싹 바꾸려고 했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춘향 전문가’에게도 노랫말을 현대화하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대본 초안을 만드는 데만 6개월 넘게 걸렸다. 한자어와 고어의 원뜻을 살리면서 시적인 리듬과 장단에 맞는 현대어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재공연을 위한 ‘수정 대본’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추가되는 첫 장면에 남원의 명승지를 소개하는 방자의 노래가 있는데 ‘유랑(遊浪·이리저리 거닐며 놀다)’이니 ‘환우성(喚友聲·벗을 부르는 소리)’이니 한자어 투성이죠. 노랫말에 있는 한자어를 다 없앴습니다.”

이 대목의 판소리 판본(김연수) 가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동문 밖 나가면 금수청풍으로 백구는 유랑이요, 녹림간의 꾀꼬리, 환우성 지어 울어 춘몽을 깨우는 듯’. 공연 대본은 ‘동문 밖 나가오면 맑은 하늘 갈매기 훨훨 날고, 푸른 숲에 꾀꼬리 짝을 찾아 서로 울며 사랑을 나누는 듯’으로 바뀌었다.

“혼자서 노래를 부르면서 잣귀에 맞는 우리말로 먼저 바꿉니다. 작창 선생님(유수정 전 국립창극단 예술감독)과 의논해 조금씩 수정하고요. 배우가 부르다가 더 편한 토씨가 나오면 반영하기도 하죠.”

춘향과 몽룡의 캐릭터를 시대 정서에 맞게 수정하는 작업도 만만치 않았다고 했다. 그는 “지금의 10~20대들이 ‘요즘 저런 사람이 어딨어’가 아니라 ‘나도 저런 적이 있는데’라고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였다”고 했다. ‘열혈 청춘 남녀의 뜨겁고 진실한 사랑’에 초점을 맞춘 창극 ‘춘향’은 그렇게 탄생했다. 재공연에선 몽룡의 순수한 캐릭터가 초연 때보다 부각된다. 봄에 들뜬 청년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과 춘향에게 이별을 통보하러 가는 심리를 표현한 눈대목이 추가됐다.

“초연에선 남자의 순수함에 감동하는 춘향의 마음에 비해 가문의 압박을 이겨내는 몽룡의 간절함이 잘 그려지지 않았어요. 이번에 보완했습니다. 제가 꿈꾸고 생각했던 ‘소년·소녀의 사랑 이야기’에 한층 가까워졌다고 할까요.”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