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 쓰나미]② '중동의 파리' 베이루트에 엄습한 '빵 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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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 전쟁이 촉발한 빵 사재기…밀가루·빵 가격 전쟁 후 2∼3배 폭등
3년간 400% 오른 물가에 화폐가치 폭락…"달러 있어야 정상 생활" 16일(현지시간)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중심가에서 조금 벗어난 데크와네 빵집 '우든 베이커리'의 판매 책임자 함단 씨는 나흘 전 '빵 대란'을 말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닥치는 대로 필요한 양 이상의 빵을 샀어요.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니까요"
이날은 이슬람 금식 성월인 라마단과 기독교의 고난 주간이 겹쳐 베이루트 시내는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다.
최악의 경제난에 반발하는 시민들의 항의 시위나 2020년 대폭발 참사 이후 이어져 온 희생자 유족의 진상규명 촉구 시위도 이날은 열리지 않았다.
빵 가게 앞에 긴 줄도 이날은 보이지 않았다.
베이루트의 빵 대란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밀이 더는 수입되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벌어졌다고 한다.
지난해 레바논이 수입한 밀 가운데 우크라이나산이 80%를 차지했다.
함단 씨는 "내가 알고 있는 한 당시 실제 밀 공급에는 문제가 없었는데 밀 공급이 중단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사람들이 불안해했던 것 같다"며 "빵 사재기는 일단 사라졌다"고 했다.
베이루트 동쪽 외곽 아슈라피에 있는 다른 빵집에서 만난 부점장 아이만(47)씨도 "내일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상황이 안정적"이라고 했다.
빵 사재기는 일단 멈췄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이 부른 밀가루와 빵 가격 폭등은 베이루트 시민들이 마주한 엄연한 현실이다.
이런 상태가 몇 달 더 이어지면 진짜 대란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크다.
함단 씨는 "전쟁 전과 비교해 밀가루 가격은 3배로 올랐고, 1봉지(대략 900g)에 5천 파운드(약 4천원)였던 흰 빵 가격은 1만1천 파운드(약 9천원)로 배 이상이 됐다"고 말했다.
아이만 씨도 "내일 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
먼 앞날을 예측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우려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레바논의 빵값에만 영향을 미친 게 아니다.
레바논 주민들이 식용유로 사용하는 우크라이나산 값싼 옥수수기름 가격도 전쟁 후 배 이상 올랐다고 한다.
베이루트 센엘필 지역에 문을 연 재래시장에서 올리브 절임과 향신료를 파는 아부 마헤르 씨는 "전쟁 전 4L짜리 한 병에 20만 파운드 하던 식용유 가격이 지금은 55만 파운드"라며 "종종 공급이 달려 물건을 못 구할 때도 있다"고 설명했다.
같은 시장의 견과류 상인인 멜리 엘딘(45)씨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밀가루와 식용유를 사용하는 가공식품 가격을 20% 올려야 했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식량 위기까지 우려하게 된 레바논의 경제 상황은 지난 3년간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정부 고위 관료들과 정치권의 부패와 무능 속에 국가 부채가 눈덩이처럼 치솟으면서 환율이 급등하기 시작했다.
이후 3년간 물가는 400%나 뛰었고 현지 화폐인 레바논 파운드화의 가치는 90% 이상 폭락했다.
여기에 2년 이상 이어진 코로나19 대유행과 2020년 베이루트 대폭발 참사 등 돌발 악재가 허약한 레바논 경제를 쓰러뜨렸다.
'중동의 파리'로 불릴 만큼 중동에서 보기 드물게 종교적 율법에서 벗어난 자유와 여유로운 분위기가 감돌던 베이루트의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폭발 책임 공방 속에 13개월간 이어진 국정 공백은 레바논 경제를 회복 불능 수준까지 몰아갔다.
전체 인구 680만여 명 중 75%에 해당하는 빈곤층은 경제난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특히 화폐가치 폭락은 에너지, 전기, 의약품 대란을 유발하며 레바논 국민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현지 거주 한인인 김 모(21) 씨는 "외국에 취업한 가족에게 달러를 송금받거나 달러 기준의 고정 수입이 있는 사람들은 그나마 정상적인 삶을 살지만,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삶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파운드화 가치 폭락은 곧 사회에 나올 준비를 하는 대학생들에게도 큰 고통이다.
전기 요금과 연료 가격이 치솟고 수입에 의존하는 기자재와 실험실 용품 등의 가격이 폭등하자 주요 대학이 수업료 중 달러 비중을 계속 늘리려고 하는 탓이다.
아메리칸대학베이루트(AUB) 석사과정생으로 수업료 달러화 비중 확대 반대운동을 주도하는 자드 하니(21) 씨는 "몇 년 전 한 학기 등록금이 2천 달러였는데 내년 봄에는 7천 달러를 내야 할 수도 있다"며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학업을 포기하는 학생이 늘어날 수 있다"고 걱정했다.
지난해 9월 출범한 레바논의 새 정부는 최근 국제통화기금(IMF)과 30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 실무 협상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다음 달 15일로 예정된 총선과 이후 새 정부 구성 등 산적한 정치 일정을 고려할 때 IMF가 요구한 구제금융 요건을 갖추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수도 있다.
또 장기 내전(1975∼1990년) 후 종파 간 세력 균형을 위해 마론파 기독교(대통령), 이슬람 수니파(총리), 이슬람 시아파(국회의장)가 권력을 분점하는 시스템이 계속 유지되는 한 경제 개혁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비관론도 적지 않다.
/연합뉴스
3년간 400% 오른 물가에 화폐가치 폭락…"달러 있어야 정상 생활" 16일(현지시간)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중심가에서 조금 벗어난 데크와네 빵집 '우든 베이커리'의 판매 책임자 함단 씨는 나흘 전 '빵 대란'을 말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닥치는 대로 필요한 양 이상의 빵을 샀어요.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니까요"
이날은 이슬람 금식 성월인 라마단과 기독교의 고난 주간이 겹쳐 베이루트 시내는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다.
최악의 경제난에 반발하는 시민들의 항의 시위나 2020년 대폭발 참사 이후 이어져 온 희생자 유족의 진상규명 촉구 시위도 이날은 열리지 않았다.
빵 가게 앞에 긴 줄도 이날은 보이지 않았다.
베이루트의 빵 대란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밀이 더는 수입되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벌어졌다고 한다.
지난해 레바논이 수입한 밀 가운데 우크라이나산이 80%를 차지했다.
함단 씨는 "내가 알고 있는 한 당시 실제 밀 공급에는 문제가 없었는데 밀 공급이 중단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사람들이 불안해했던 것 같다"며 "빵 사재기는 일단 사라졌다"고 했다.
베이루트 동쪽 외곽 아슈라피에 있는 다른 빵집에서 만난 부점장 아이만(47)씨도 "내일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상황이 안정적"이라고 했다.
빵 사재기는 일단 멈췄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이 부른 밀가루와 빵 가격 폭등은 베이루트 시민들이 마주한 엄연한 현실이다.
이런 상태가 몇 달 더 이어지면 진짜 대란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크다.
함단 씨는 "전쟁 전과 비교해 밀가루 가격은 3배로 올랐고, 1봉지(대략 900g)에 5천 파운드(약 4천원)였던 흰 빵 가격은 1만1천 파운드(약 9천원)로 배 이상이 됐다"고 말했다.
아이만 씨도 "내일 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
먼 앞날을 예측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우려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레바논의 빵값에만 영향을 미친 게 아니다.
레바논 주민들이 식용유로 사용하는 우크라이나산 값싼 옥수수기름 가격도 전쟁 후 배 이상 올랐다고 한다.
베이루트 센엘필 지역에 문을 연 재래시장에서 올리브 절임과 향신료를 파는 아부 마헤르 씨는 "전쟁 전 4L짜리 한 병에 20만 파운드 하던 식용유 가격이 지금은 55만 파운드"라며 "종종 공급이 달려 물건을 못 구할 때도 있다"고 설명했다.
같은 시장의 견과류 상인인 멜리 엘딘(45)씨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밀가루와 식용유를 사용하는 가공식품 가격을 20% 올려야 했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식량 위기까지 우려하게 된 레바논의 경제 상황은 지난 3년간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정부 고위 관료들과 정치권의 부패와 무능 속에 국가 부채가 눈덩이처럼 치솟으면서 환율이 급등하기 시작했다.
이후 3년간 물가는 400%나 뛰었고 현지 화폐인 레바논 파운드화의 가치는 90% 이상 폭락했다.
여기에 2년 이상 이어진 코로나19 대유행과 2020년 베이루트 대폭발 참사 등 돌발 악재가 허약한 레바논 경제를 쓰러뜨렸다.
'중동의 파리'로 불릴 만큼 중동에서 보기 드물게 종교적 율법에서 벗어난 자유와 여유로운 분위기가 감돌던 베이루트의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폭발 책임 공방 속에 13개월간 이어진 국정 공백은 레바논 경제를 회복 불능 수준까지 몰아갔다.
전체 인구 680만여 명 중 75%에 해당하는 빈곤층은 경제난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특히 화폐가치 폭락은 에너지, 전기, 의약품 대란을 유발하며 레바논 국민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현지 거주 한인인 김 모(21) 씨는 "외국에 취업한 가족에게 달러를 송금받거나 달러 기준의 고정 수입이 있는 사람들은 그나마 정상적인 삶을 살지만,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삶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파운드화 가치 폭락은 곧 사회에 나올 준비를 하는 대학생들에게도 큰 고통이다.
전기 요금과 연료 가격이 치솟고 수입에 의존하는 기자재와 실험실 용품 등의 가격이 폭등하자 주요 대학이 수업료 중 달러 비중을 계속 늘리려고 하는 탓이다.
아메리칸대학베이루트(AUB) 석사과정생으로 수업료 달러화 비중 확대 반대운동을 주도하는 자드 하니(21) 씨는 "몇 년 전 한 학기 등록금이 2천 달러였는데 내년 봄에는 7천 달러를 내야 할 수도 있다"며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학업을 포기하는 학생이 늘어날 수 있다"고 걱정했다.
지난해 9월 출범한 레바논의 새 정부는 최근 국제통화기금(IMF)과 30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 실무 협상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다음 달 15일로 예정된 총선과 이후 새 정부 구성 등 산적한 정치 일정을 고려할 때 IMF가 요구한 구제금융 요건을 갖추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수도 있다.
또 장기 내전(1975∼1990년) 후 종파 간 세력 균형을 위해 마론파 기독교(대통령), 이슬람 수니파(총리), 이슬람 시아파(국회의장)가 권력을 분점하는 시스템이 계속 유지되는 한 경제 개혁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비관론도 적지 않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