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한경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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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퇴장이다. 김포공항 활주로, 서울 여의도 63빌딩, 잠실 롯데월드타워에 모두 이 공장에서 만든 레미콘이 들어갔다. 하지만 ‘산업화의 공로’를 평가받기는커녕 ‘혐오시설’ 취급만 받다가 갈 곳도 정하지 못한 채 방부터 먼저 빼는 처지가 됐다. 레미콘업체 삼표산업의 서울 성수동 공장 얘기다.

“대체 부지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6월 말까지 철거를 진행합니다. 쫓겨나듯 시설을 해체하는 것이 45년간 한국 산업을 지탱해온 시설에 어울리는 고별식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지난달 28일 성수동 삼표 레미콘 공장 해체 공사 착공식을 바라보는 윤인곤 삼표산업 대표의 표정은 어두웠다.
삼표 관계자와 대조적으로 인근 주민들은 시설 철거를 반기는 분위기다. 소음과 분진이 줄고 레미콘 믹서트럭이 유발하던 교통체증이 해결될 전망이어서다. 레미콘 시설이 사라지고 서울을 상징하는 핫플레이스가 들어선다는 계획도 기대를 키운다. 하지만 사라지는 공장은 과연 기억할 필요도 없는 ‘흉물’이나 ‘위험시설’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성수동 1가 683 삼표 레미콘 공장은 1972년 강원산업그룹(현 삼표산업)이 매립공사를 거쳐 지었다. 2만7828㎡ 공장 부지를 포함해 인근 13만㎡(4만 평)는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 모래 퇴적층이 쌓인 지대였다. 매년 홍수 피해가 발생하자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이 매립을 지시했다. 당시 골재 사업을 하던 강원산업그룹이 공사를 맡았고, 골재 채취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 1977년 부지 위에 레미콘 공장을 가동했다.

성수 공장은 수도권 대규모 택지개발에 레미콘을 공급하는 핵심 기지 역할을 했다. 45년간 서울 주요 공사 현장에 79.3㎡(24평) 아파트 기준 200만 가구를 건설할 수 있는 4500만㎥ 규모의 레미콘을 공급했다. 김포공항 활주로, 정부과천청사, 여의도 63빌딩부터 강북 뉴타운 조성 공사, 청계천 복원 공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롯데월드타워 등에 삼표 레미콘이 들어갔다. 삼표그룹 관계자는 “성수 공장이 없었다면 서울 주요 지역 건설 공사가 큰 차질을 빚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단일 공장으론 아시아 최대 규모 레미콘 생산 시설이기도 했다. 5대의 레미콘 배합설비(배치플랜트)에서 하루 1200여 대의 레미콘 믹서트럭이 레미콘을 받아갔다. 최대 생산량은 롯데월드타워 8개를 지을 수 있는 연 175만㎥에 달했다.

하지만 대형 산업시설을 도시 외부로 빼내라는 시대의 압력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인근에 대규모 주거단지가 들어서자 서울시와 성동구, 공장 운영사인 삼표산업과 부지 소유주인 현대제철은 공장을 2022년 6월까지 이전하고 부지를 공원화하는 내용의 협약을 2017년 체결했다. 이후 5년간 100여 차례 협상을 거친 끝에 삼표가 현대제철로부터 부지를 매입한 뒤 독자 개발하는 방향으로 변경됐다. 현재 공장 부지를 청년 창업 공간이나 K팝 공연장 등으로 바꾸는 방안을 고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떠나는 순간까지 삼표의 마음은 편치 않다. 대체 부지를 찾지 못해서다. 2017년 협약 땐 새 공장 부지를 마련한 뒤 이전키로 했지만 ‘공수표’가 됐다. 성동구 등 30여 곳과 부지 확보 협상을 진행 중이지만 결과를 낙관하기 힘들다.

공장 이전은 서울 시민의 삶에도 차질을 빚을 수 있다. 당장 서울지역 재건축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레미콘은 시간이 지나면 굳는 특성 때문에 품질 유지를 위해 출하에서 현장 타설까지 60분 안에 이뤄져야 하는데 교통체증이 심한 서울에선 마땅한 대안이 없는 탓이다.

삼표그룹 관계자는 “성수 공장은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아파트를 대량 공급할 수 있도록 한 공간”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산업화의 상징’에 어울리는 품위 있는 석별의 인사가 오가길 기대했던 것은 지나친 바람이었을까….

안대규 기자 powerzani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