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들 "재판에 영향" 반대해 무산…민중기 前원장 "제안한 적 없고 의견만 들어"
'판사 사찰' 논란때 법원장이 일선에 '尹비판' 입장 표명 제안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검찰총장 시절 불거진 '판사 사찰'(재판부 사찰) 논란과 관련해 당시 서울중앙지법원장이 일선 판사들에게 검찰을 비판하는 취지의 입장을 내자고 제안했다가 판사들의 반대로 성사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4일 법조계에 따르면 민중기(63·사법연수원 14기) 당시 서울중앙지법원장(현 변호사)은 2020년 11월 서울중앙지법 김병수 형사수석부장판사와 형사합의부 부장판사들을 모아 판사 사찰 논란과 관련한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한 부장판사는 "민 전 원장이 검찰을 비판하는 취지의 입장을 내자고 제안했고 김 전 수석 역시 원장의 의견에 동조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 부장판사는 또 "민 전 원장이 입장 표명을 강제하거나 요구한 것은 아니고 제안하는 정도였다"면서도 "원장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반대하기 불편했다"고 부연했다.

자리에 모였던 부장판사 대부분은 문건에 담긴 내용이 심각한 사찰에 이르렀다고 보기 어렵고 문건을 둘러싼 재판이 진행 중인 점을 고려해 법원이 공식 입장을 내는 데 반대했고, 결국 다수의 의견에 따라 입장을 내지 않는 것으로 결정됐다.

민 전 원장은 김명수 대법원장의 대학 동기로, 김 대법원장이 회장을 맡았던 진보 성향의 판사 모임 '우리법연구회' 출신으로도 알려져 있다.

김 대법원장 체제에서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을 조사한 법원 추가조사위원회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서울중앙지법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부부 사건과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사법 농단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여러 사건을 담당하고 있다.

당시 자리에는 이 사건들을 맡은 부장판사들도 참석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판사 사찰 문건은 주요 사건을 담당한 재판부의 특징들을 '주요 특수·공안사건 재판부 분석'이라는 제목으로 요약한 문건이다.

이 문건을 작성하도록 지시했다는 이유로 당시 검찰총장이었던 윤석열 당선인은 직무정지 처분과 징계를 받았다.

민 전 원장이 형사합의부 부장판사들을 모아 의견을 수렴한 것은 윤 당선인이 직무정지 처분에 불복해 서울행정법원에 제기한 집행정지 심문을 앞둔 시점이었다.

부장판사들이 입장 표명에 부정적인 의견을 낸 것은 집행정지 사건에 영향을 줄 것을 우려한 결과로 풀이된다.

윤 당선인은 징계와 직무정지를 둘러싼 집행정지 신청 사건에서는 모두 인용 결정을 받아내 검찰총장 직무에 복귀했으나 이후 징계를 둘러싼 소송 본안 1심에서는 패소했다.

민 전 원장은 "부장판사들에게 입장 표명을 요구한 일이 없다"며 "거기(사찰 문건)에 나오는 재판부가 대부분 서울중앙지법 재판부여서 당사자들인 형사합의부 판사들의 의견을 듣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의견을 들었던 것이 전부"라고 밝혔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