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 현재 관련 자료 확인 중…8월 심사 때 결정 예정
'백마 탄 여장군' 항일투사 김명시, 독립유공자 서훈 재심의
일제강점기 항일 무장투쟁에 앞장서 '백마 탄 여장군'이라 불린 김명시(1907∼1949, 경남 마산 출생)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 여부를 가릴 심의가 재차 추진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창원을 거점으로 하는 민간단체인 열린사회희망연대는 지난해 11월 김명시 장군의 독립유공자 여부에 대한 심의를 재개해달라고 국가보훈처에 요청해 현재 심의가 진행되고 있다고 24일 밝혔다.

연대 측은 지난해 7월 제출한 김명시 장군에 대한 두 번째 독립유공자 등록 신청이 '사망 경위 등 광복 후 행적 불분명'을 사유로 한 달 만에 불가 통지를 받자 재심의를 요청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가보훈처는 김명시 장군 사망 당시 직책이 '북로당 중앙위원'으로 발표된 점에 미뤄 김 장군을 북한 정부 수립에 기여한 것으로 판단해 서훈 불가 판정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을 표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연대 측은 "북한 정부 수립에 기여한 사람들을 모아둔 북한 신미리애국열사릉 명단에 김 장군은 포함돼 있지 않다"며 재심사를 강력히 요청한 바 있다.

이 단체는 앞서 2019년 1월 처음으로 김명시 장군에 대한 독립유공자 등록 신청을 했지만, 국가보훈처는 그해 11월 불가 통지를 했다.

연대 측 재심의 요청을 받아들인 국가보훈처는 현재 관련 자료 확인 절차를 진행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오는 8·15 광복절을 계기로 열릴 심사 때 김명시 장군 등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 여부를 결정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명시 장군은 19살이던 1925년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났다가 1927년 상하이에서 항일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일제의 만주침략이 다가오던 1930년에는 하얼빈 일본영사관 공격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1932년에는 국내로 잠입해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혹독한 심문을 받고 7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이후에는 중국으로 망명해 항일 무장투쟁을 이어갔다.

1942년 조선의용군 여성부대를 지휘하면서 '여장군' 호칭을 얻게 됐다.

한 손에는 총을, 다른 손에는 확성기를 들고 일본군과 맞서 싸우는 모습에 '백마 탄 여장군'으로도 불렸다.

해방 이후에는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극렬한 이념 갈등이 이어지는 가운데 1948년 10월 부평경찰서에서 생을 마감했다.

지역사회에서는 그동안 김명시 장군을 기리기 위한 각종 사업을 진행해왔다.

꿈꾸는산호작은도서관은 지난해 창원시 양성평등기금에서 680만원 지원(자부담 별도)을 받아 시 소재 고등학교 여학생들과 함께 '백마 탄 여장군 김명시' 그림책을 제작했다.

시는 2020년에는 마산합포구 오동동 문화광장 김명시 장군 생가터에서 그가 다닌 성호초등학교(옛 마산공립보통학교)로 향하는 오동서1길 돌담 골목 70여m에 '김명시 장군의 학교길'을 개장하고, 생가터에 표지판을 세우기도 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