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전등화' 우크라이나…고난의 길 걸어온 동서유럽의 균형추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구로카와 유지의 책 '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
결국 전쟁이 일어나고 말 것인가.
우크라이나 상황이 살얼음판을 걷듯 위태롭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가능성이 부각되고 세계 각국이 대사관과 교민 철수를 서두르면서 미국과 유럽 등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국가와 러시아 사이의 대결 국면은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렵게 됐다.
동서 유럽 사이에 힘의 균형추 역할을 해온 우크라이나가 이처럼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된 배경은 뭘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때마침 국내 출간된 '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는 러시아의 그늘에 가려진 우크라이나의 어제와 오늘을 탐색한다.
저자는 주(駐)우크라이나 일본대사를 지낸 구로카와 유지(黑川祐次) 씨로, 현재 국제우크라이나학회 일본 지부를 이끌고 있다.
저자는 근대 들어 러시아와 유럽의 틈바구니에서 강국들의 침략을 받은 고난의 역사를 서술해간다.
나아가 우크라이나가 어떻게 타민족의 지배와 그로부터 독립을 반복하며 지금 같은 국가로 번창할 수 있었는지 핵심 계기들을 살핀다.
우크라이나는 명실상부한 대국이 될 만큼 커다란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
나라 면적이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넓고, 유럽 최대 철광석 산지이며, 세계 흑토지대의 30퍼센트를 차지해 '유럽의 곡창'이 될 잠재력도 지녔다.
지정학적으로도 요충지를 차지하고 있어 고난의 역사를 겪어야 했다.
서유럽과 러시아, 아시아를 잇는 통로인 탓에 대북방전쟁, 나폴레옹전쟁, 크림전쟁, 제1·2차 세계대전의 전장이 됐다.
우크라이나를 누가 장악하느냐에 따라 동서 간 힘의 균형이 달라졌던 것. 푸틴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려 하고, 미국 등 국제사회가 강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작금의 상황을 봐도 그 지정학적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우크라이나는 고골, 호로비츠, 니진스키, 말레비치 같은 문화예술계 대가들도 다수 배출했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도스토옙스키, 차이콥스키 등도 그 선조가 우크라이나 출신이었다.
음악가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발레 무용수 바츨라프 니진스키, 아방가르드 회화의 창시자 카지미르 말레비치, 피겨스케이팅 선수 옥사나 바울 또한 그렇다.
그 역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건 오랫동안 나라가 없었다는 점. 그렇다고 국가가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 지역의 키예프 루스 공국은 10~12세기 당시 유럽의 대국으로 군림했고 훗날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의 기반이 됐으나 몽골의 침략 등으로 쇠퇴하고 말았다.
이를 고비로 동슬라브의 종가(宗家)였던 우크라이나는 그 분가(分家)에 해당하는 모스크바에 중심을 빼앗겼다.
'루스(러시아)'라는 이름을 잃고 난 뒤 자신의 정체성을 얻고자 우크라이나라는 이름을 새로 만들어야 했던 것. 모스크바에서 발흥한 나라가 훗날 대국이 돼 자국을 러시아로 명명하고 키예프 루스를 잇는 정통 국가로 자임하고 나서는 바람에 우크라이나의 역사는 '나라 없는' 민족의 역사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나라가 없다는 결점에 언어·문화·관습이 유사한 대국인 러시아를 이웃으로 두고 있으면서도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러시아 등 여러 나라가 우크라이나를 지배했지만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 관습을 키워가며 내셔널리즘을 유지했던 것. 그리고 1991년 마침내 독립을 맞이하게 된다.
근현대 역사를 개괄해보면,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폴란드 등 여러 나라가 탐내왔던 땅이었다.
18세기 말부터 1차대전까지 120년 동안 영토의 80퍼센트가 러시아 제국, 20퍼센트가 오스트리아 제국에 지배당했다.
이어 1922년 소련이 성립되면서 약 70년 동안 그 연방의 한 부분으로 종속돼 커다란 고통을 겪어야 했다.
우크라이나는 제2차대전에서 인구의 6분의1인 530만 명을 잃었고, 이 시기 소련 전체의 물질적 손해 중 40퍼센트가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했다.
이런 피해 규모는 러시아, 독일, 프랑스, 폴란드가 각각 입은 것보다 더 컸다고 한다.
이후 거의 모든 우크라이나인 거주 지역은 소연방 체제 아래 우크라이나공화국으로 합쳐졌는데, 이는 키예프 루스 붕괴 이후 우크라이나 역사상 첫 통합이었다.
우크라이나의 독립 선언은 20세기 들어 수차례 이뤄졌으나 번번이 무산됐다.
그리고 1991년에 이르러 여섯 번째 선언으로 우크라이나인이 사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독자적 통치능력을 발휘하는 정부가 탄생했다.
러시아사에서는 '우크라이나'라는 단어 자체를 '변경지대'로 해석해왔는데, 마침내 변경이 아닌 '중심국가'로 우뚝 섰다고 하겠다.
저자는 "우크라이나의 향방에 따라 동서의 힘의 균형이 달라졌다"며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유지하고 안정되는 것이 유럽, 나아가 세계의 평화와 안정에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풍전등화 같은 지금의 우크라이나 상황을 함축해주는 말이다.
안선주 옮김. 글항아리 펴냄. 296쪽. 1만6천원.
/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상황이 살얼음판을 걷듯 위태롭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가능성이 부각되고 세계 각국이 대사관과 교민 철수를 서두르면서 미국과 유럽 등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국가와 러시아 사이의 대결 국면은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렵게 됐다.
동서 유럽 사이에 힘의 균형추 역할을 해온 우크라이나가 이처럼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된 배경은 뭘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때마침 국내 출간된 '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는 러시아의 그늘에 가려진 우크라이나의 어제와 오늘을 탐색한다.
저자는 주(駐)우크라이나 일본대사를 지낸 구로카와 유지(黑川祐次) 씨로, 현재 국제우크라이나학회 일본 지부를 이끌고 있다.
저자는 근대 들어 러시아와 유럽의 틈바구니에서 강국들의 침략을 받은 고난의 역사를 서술해간다.
나아가 우크라이나가 어떻게 타민족의 지배와 그로부터 독립을 반복하며 지금 같은 국가로 번창할 수 있었는지 핵심 계기들을 살핀다.
우크라이나는 명실상부한 대국이 될 만큼 커다란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
나라 면적이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넓고, 유럽 최대 철광석 산지이며, 세계 흑토지대의 30퍼센트를 차지해 '유럽의 곡창'이 될 잠재력도 지녔다.
지정학적으로도 요충지를 차지하고 있어 고난의 역사를 겪어야 했다.
서유럽과 러시아, 아시아를 잇는 통로인 탓에 대북방전쟁, 나폴레옹전쟁, 크림전쟁, 제1·2차 세계대전의 전장이 됐다.
우크라이나를 누가 장악하느냐에 따라 동서 간 힘의 균형이 달라졌던 것. 푸틴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려 하고, 미국 등 국제사회가 강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작금의 상황을 봐도 그 지정학적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우크라이나는 고골, 호로비츠, 니진스키, 말레비치 같은 문화예술계 대가들도 다수 배출했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도스토옙스키, 차이콥스키 등도 그 선조가 우크라이나 출신이었다.
음악가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발레 무용수 바츨라프 니진스키, 아방가르드 회화의 창시자 카지미르 말레비치, 피겨스케이팅 선수 옥사나 바울 또한 그렇다.
그 역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건 오랫동안 나라가 없었다는 점. 그렇다고 국가가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 지역의 키예프 루스 공국은 10~12세기 당시 유럽의 대국으로 군림했고 훗날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의 기반이 됐으나 몽골의 침략 등으로 쇠퇴하고 말았다.
이를 고비로 동슬라브의 종가(宗家)였던 우크라이나는 그 분가(分家)에 해당하는 모스크바에 중심을 빼앗겼다.
'루스(러시아)'라는 이름을 잃고 난 뒤 자신의 정체성을 얻고자 우크라이나라는 이름을 새로 만들어야 했던 것. 모스크바에서 발흥한 나라가 훗날 대국이 돼 자국을 러시아로 명명하고 키예프 루스를 잇는 정통 국가로 자임하고 나서는 바람에 우크라이나의 역사는 '나라 없는' 민족의 역사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나라가 없다는 결점에 언어·문화·관습이 유사한 대국인 러시아를 이웃으로 두고 있으면서도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러시아 등 여러 나라가 우크라이나를 지배했지만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 관습을 키워가며 내셔널리즘을 유지했던 것. 그리고 1991년 마침내 독립을 맞이하게 된다.
근현대 역사를 개괄해보면,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폴란드 등 여러 나라가 탐내왔던 땅이었다.
18세기 말부터 1차대전까지 120년 동안 영토의 80퍼센트가 러시아 제국, 20퍼센트가 오스트리아 제국에 지배당했다.
이어 1922년 소련이 성립되면서 약 70년 동안 그 연방의 한 부분으로 종속돼 커다란 고통을 겪어야 했다.
우크라이나는 제2차대전에서 인구의 6분의1인 530만 명을 잃었고, 이 시기 소련 전체의 물질적 손해 중 40퍼센트가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했다.
이런 피해 규모는 러시아, 독일, 프랑스, 폴란드가 각각 입은 것보다 더 컸다고 한다.
이후 거의 모든 우크라이나인 거주 지역은 소연방 체제 아래 우크라이나공화국으로 합쳐졌는데, 이는 키예프 루스 붕괴 이후 우크라이나 역사상 첫 통합이었다.
우크라이나의 독립 선언은 20세기 들어 수차례 이뤄졌으나 번번이 무산됐다.
그리고 1991년에 이르러 여섯 번째 선언으로 우크라이나인이 사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독자적 통치능력을 발휘하는 정부가 탄생했다.
러시아사에서는 '우크라이나'라는 단어 자체를 '변경지대'로 해석해왔는데, 마침내 변경이 아닌 '중심국가'로 우뚝 섰다고 하겠다.
저자는 "우크라이나의 향방에 따라 동서의 힘의 균형이 달라졌다"며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유지하고 안정되는 것이 유럽, 나아가 세계의 평화와 안정에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풍전등화 같은 지금의 우크라이나 상황을 함축해주는 말이다.
안선주 옮김. 글항아리 펴냄. 296쪽. 1만6천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