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격한 기준 조건 원자력·가스 논쟁 끝 포함해
회원국·유럽의회, 최장 6개월 검토…반대 없으면 내년 발효
어디까지가 '녹색 에너지'인가…EU 택소노미 진통
유럽연합(EU) 행정부 격인 집행위원회가 최근 논란 끝에 일부 천연가스와 원자력 활동을 '녹색'으로 분류하는 법안을 공식화하면서 유럽에서 논쟁이 본격적으로 가열되고 있다.

EU 집행위는 지난 2일 일부 회원국과 유럽의회 의원들, 전문가 자문단의 반대와 경고에도 엄격한 조건에서 특정 원자력, 가스 에너지 활동을 EU 녹색분류체계(Taxonomy·택소노미)에 포함하는 기후 위임법을 내놨다.

EU 택소노미는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 '녹색' 경제 활동으로 인정되는 목록을 담은 분류 체계다.

이번 법안은 EU 27개 회원국 가운데 20개국 이상, 또는 유럽의회 전체 의원 중 과반(353명)이 반대하면 거부될 수 있다.

앞으로 최장 6개월간 법안 검토를 거치고 이런 반대가 없으면 내년 1월 1일 발효된다.

◇EU, 택소노미로 '지속가능한' 경제활동에 투자 유도
EU 택소노미는 2050년까지 탄소 중립을 이룬다는 EU 집행위의 야심찬 목표를 이루는 데 필요한 수단 중 하나다.

탄소 중립은 온난화를 유발하는 탄소 배출량을 신재생 에너지 발전 등 탄소 감축·흡수 활동을 통해 상쇄해 실질적인 순(net) 배출 총량을 '0'으로 만드는 것을 뜻한다.

EU 집행위는 이 같은 목표를 달성하려면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 사업과 활동에 민간 투자를 더 많이 유도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보고 있다.

EU 택소노미는 EU의 이 같은 기후, 환경 목표에 맞는 민간 투자 목적의 경제 활동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한 기준과 조건을 담고 있다.

기업과 투자자, 정책 입안자가 투자를 결정하거나 녹색 투자 상품을 설계하는 경우 등에 참고, 활용할 수 있는 도구다.

최근 'ESG'(환경·사회·지배구조)가 기업 경영과 자본시장에서 세계적인 화두로 떠올라 '친환경'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투자 상품이 시장에 나오는 상황에서 '그린워싱'(greenwashing·위장 환경주의)을 막는 투명한 이정표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 목표다.

그린워싱은 실제로는 친환경적이지 않지만 친환경인 척 홍보하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EU 택소노미는 투자자가 지켜야 하는 의무적 경제 활동의 목록은 아니다.

공공 투자, 기업의 환경 경영 실적을 위해 필요한 요건도 아니다.

다만, 녹색 투자를 추구하는 투자자가 EU 택소노미에 부합하는 활동에 더 관심을 두고 들여다볼 가능성은 있을 수 있다.

이에 따라 EU 내에서 혹은 EU 기업, 투자자와 사업을 하는 업체에는 기회가 될 수도, 잠재적인 위험 요인이 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EU 내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과 투자자의 경우 EU 택소노미에 부합하는 활동의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 공개해야 한다.

이런 기업의 정보가 투자자에게도 공개되기 때문에 녹색 투자에 관심이 있는 기관 투자자나 개별 투자자, 은행 등의 관심을 더 받을 수도 있다.

대형 은행이 EU 택소노미에 부합하는 경제활동에 대출 우대를 한다면 이는 관련 활동을 하는 회사가 더 나은 이율로 대출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게 EU 집행위의 설명이다.

법이 발효돼도 EU 택소노미에 부합하는 활동이 없는 회사라고 금융 서비스에 접근하지 못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EU 외에도 중국, 일본, 영국, 캐나다 등도 자체적인 분류체계를 만들고 있다.

한국도 지난해 말 어떤 경제활동이 친환경적이고 탄소중립에 이바지하는지 규정한 '한국형 녹색분류체계'(K-택소노미·K-Taxonomy) 지침서를 공개했다.

어디까지가 '녹색 에너지'인가…EU 택소노미 진통
◇가스·원자력 논쟁 끝 '녹색' 분류
EU 택소노미는 여러 부문을 아우른다.

제조업, 교통, 건물 등 다른 대다수 부문에 대한 규정은 이미 지난해 4월 발표돼 최근 발효됐다.

하지만, 가스와 원자력 에너지에 대해서는 EU 회원국 간 견해차가 커 오랫동안 입법 절차가 지연됐다.

EU 회원국 중 전력생산의 70%를 원자력 발전에 기대는 프랑스와 폴란드, 체코, 핀란드 등은 당연히 택소노미에 원자력을 넣자는 입장이다.

탈원전을 지향하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룩셈부르크, 포르투갈, 덴마크 등은 원자력 에너지의 최대 난제인 핵폐기물 처리 문제 등을 이유로 반대한다.

EU 집행위는 이러한 논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결국 특정 조건을 갖춘 원자력, 가스 에너지 활동을 이번에 EU 택소노미에 포함했다.

EU 집행위는 원자력과 가스가 안전성과 환경성과 관련한 엄격한 조건을 맞춘다면 석탄과 같이 오염이 가장 심한 화석 연료에서 탄소중립 경제로 전환하는 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봤다.

재생가능에너지로의 전환은 탄소중립을 위해 필수적이지만 그 전환을 가속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자원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원자력 활동이 '녹색'으로 인정받기 위해 충족해야 할 기준은 꽤 높다.

신규 원자력 발전소 사업은 2045년까지 건설 허가를 받아야 하고 2050년까지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 시설 가동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조건을 만족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 시설은 원자력의 지속가능성을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반감기가 수만∼수십만 년인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을 처분해야 해 부지 확보에만 수십년이 걸리는 문제다.

전체 전력 생산의 30% 이상을 원자력에 의존하는 한국은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 부지 선정조차 하지 못했다.

또 아직 상용화하지 않은 사고 저항성 핵연료(ATF)를 사용해야 한다는 규제도 포함됐다.

ATF는 원자로 냉각기능이 상실되는 대형 사고가 나도 핵연료의 안전성을 장시간 유지할 수 있는 연료를 뜻한다.

현재 사용하는 지르코늄 합금 연료봉은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때 한계점이 드러나 개발을 시작했다.

미국 에너지부는 2025년 상용화를 목표로 잡았다.

가스 관련 활동은 킬로와트시(kWh)당 270g 미만의 이산화탄소(CO2)를 배출하거나 전력 생산 활동 시 연간 온실가스 배출량이 20년간 평균 킬로와트(kW)당 550㎏을 넘지 않는 경우 등의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자료를 보면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은 kWh당 549g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어디까지가 '녹색 에너지'인가…EU 택소노미 진통
◇유럽의회·회원국 내 반대 움직임 계속…진통 예상
유럽의회 일각과 일부 EU 회원국에서는 반대가 계속되고 있어 입법 절차가 최종 마무리되기까지는 진통이 예상된다.

유럽의회의 표결 결과에 대해서는 부결되기는 어렵다는 전망과 함께 통과 여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는 관측이 엇갈린다.

EU 회원국은 일부 반대가 있기는 하지만 이번 규정이 회원국에 의해 막힐 가능성은 작다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다만 오스트리아와 룩셈부르크는 앞서 이번 규정에 대해 EU 집행위를 상대로 법적 대응을 경고한 바 있다.

메어리드 맥기니스 금융 서비스 담당 EU 집행위원은 이번 법안이 "불완전할수도 있지만 탄소중립이라는 궁극적 목표로 우리를 가도록 하는 실질적 해결책"이라고 말했다.

싱크탱크인 유럽지속가능한투자포럼은 "이번 결정은 EU 택소노미의 신뢰성을 약화하고 투자 도구로서의 유용성을 줄일 수 있다"면서 "가스, 원자력을 EU 택소노미에 포함한 것은 투자자가 이들 활동을 보는 방식에 큰 영향을 줄 것 같지는 않다"고 지적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