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시선] 다시, '진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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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방가르드도 현재는 클래식
인간사 반영 '정치' 불변할 리 만무
진보의 영혼은 타락 알아차리면
어딘가 다른 몸으로 자리 옮겨
사라진 진보는 대체 어디에
누가 진보의 탈을 쓴 '반동'인가
이응준 시인·소설가
인간사 반영 '정치' 불변할 리 만무
진보의 영혼은 타락 알아차리면
어딘가 다른 몸으로 자리 옮겨
사라진 진보는 대체 어디에
누가 진보의 탈을 쓴 '반동'인가
이응준 시인·소설가
1978년 6월 5일 출간돼 2017년 4월 10일 300쇄를 찍은 조세희 연작소설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리얼리즘을 모더니즘으로 형상화한 한국 현대소설의 명작이다. 나는 매년 겨울 재독하곤 한다. 사회 참여가 모토인 소설가들은 부지기수다. 하지만 사회 문제와 정면승부하면서도 구호나 선동에 매몰되지 않고 미학을 확보한 소설책은 희귀하다. 내가 이 작품을 사랑하는 건 ‘혁명성’보다는 ‘예술성’, ‘분노’보다는 ‘슬픔’ 때문이다. 어쩌면 ‘거인’과 ‘난장이’라는 이분법이 진리처럼 수용되던 시대가 더 행복했는지도 모른다.
《난쏘공》은 서론 격인 단편 ‘뫼비우스의 띠’로 시작한다. 수학교사가 질문한다. 두 아이가 굴뚝 청소를 끝마쳤다. 한 아이는 새까맣고 한 아이는 깨끗하다. 어느 아이가 얼굴을 씻을까? 한 학생이 대답한다. 더러운 아이가 얼굴을 씻을 겁니다. 수학교사가 말한다. 아니다. 새까만 아이는 깨끗한 아이를 보고 자기도 깨끗하다고 생각한다. 수학교사는 똑같은 질문을 다시 던진다. 한 학생이 대답한다. 저희는 이제 정답을 알고 있잖아요. 수학교사가 말한다. 틀렸다. 두 아이는 함께 굴뚝 청소를 했다. 하나만 더럽고 다른 하나는 깨끗하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어서 수학교사는 뫼비우스의 띠에 대해 생각해보자고 한다. 안과 겉, 내부와 외부를 구분할 수 없는 곡면에 관해. 그렇게 많이 읽었건만, 얼마 전까지 나는 이 단편의 통합적이고 자기반성적인 경향이 《난쏘공》 전체와는 이질적이라고 여겼더랬다. ‘난장이들’을 지지하고 졸부자본주의 군부독재 체제를 증오하는 작가와 작품의 목소리는 이 작품의 미학적 완성과 ‘작가의 말’의 아름다움과는 별도로 무섭도록 단호해서다.
《대반열반경》 속 부처의 죽음 직전 모습은 인상적이다. 그는 울고 있는 제자들을 타이른다. “슬퍼하지 마라. 내가 늘 말하지 않았더냐. 세상 모든 것들은 변하고 소멸한다고. 변하고 소멸해야만 하는 모든 것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독문과 대학원 시절 문예이론 교수님의 제안으로 그날 수업은 존 케이지를 비롯한 전위예술가들의 작품이 초청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됐다. 관람을 마친 우리는 카페에 둘러앉아 토론을 했고, 나는 이런 견해를 피력했다. “저 작품들은 전위예술이 아닙니다. 유럽과 영미에서 등장했던 당시에는 아방가르드 혹은 프로그레시브였겠지만, 한국 국립현대미술관에 놓인 현재는 클래식이거나 화석이기 때문입니다.” 예술이 이럴진대, 인간사를 즉각 반영하는 ‘정치’의 외양과 내용이 고정불변할 리 만무하다. 만약 그런 게 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고, 결국 ‘가짜’라는 소리가 된다.
조세희는 ‘작가의 말’에 이렇게 썼다. “제일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악’이 내놓고 ‘선’을 가장하는 것이었다. 악이 자선이 되고 희망이 되고 진실이 되고, 또 정의가 되었다.” 이 문장이 요즘은 어떻게 읽히는가? 소금이 맛을 잃으면 흰모래가 되는 것처럼, 진보의 영혼은 부패와 타락을 알아차리는 순간 어딘가 다른 몸으로 자리를 옮겨버린다. 우리는 ‘변화’ 자체에 집중하고 그것을 실체로 삼으며 살아야 한다. 인간은 안과 밖을 구분하지 못하는 뫼비우스의 띠를 따라서 변하며 여행하다가 사라지는 존재다. 《난쏘공》은 《탈무드》의 ‘굴뚝 속의 두 형제’를 변용한 ‘뫼비우스의 띠’ 때문에 오히려 이 시대에도 생명력을 지닌다. 작가의 ‘무의식적 의도’와 문학작품의 진실은 이러한 예언적 기능으로 스스로를 갱신한다. 자유주의자는 이 ‘아수라’ 같은 나라에서 숨 쉴 구석이 없지만, 더 이상 진보가 아닌 것을 아니라고 지적할 자유는 권리이자 용기다.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인간이라는 속물은 남한테 속는 것보다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남의 거짓말보다 자기 거짓말을 더 믿고 사는 것이다.” 한 굴뚝에서 내려온 재투성이임에도 불구하고 너의 얼굴만 더럽다고 비난하는 우리 허깨비들에게 ‘뫼비우스의 띠’의 수학교사도 《탈무드》의 랍비도 미처 해주지 못한 얘기가 있다. 너와 나는 ‘합심해’ 저 굴뚝을 ‘청소’하려고 들어갔던 거라는 바로 그 사실 말이다. 사라진 진보는 대체 어디에, 누구의 가슴 속으로 자리를 옮겼는가? 오늘 우리 앞에서, 누가 진보의 인형탈을 뒤집어쓴 ‘반동’인가.
《난쏘공》은 서론 격인 단편 ‘뫼비우스의 띠’로 시작한다. 수학교사가 질문한다. 두 아이가 굴뚝 청소를 끝마쳤다. 한 아이는 새까맣고 한 아이는 깨끗하다. 어느 아이가 얼굴을 씻을까? 한 학생이 대답한다. 더러운 아이가 얼굴을 씻을 겁니다. 수학교사가 말한다. 아니다. 새까만 아이는 깨끗한 아이를 보고 자기도 깨끗하다고 생각한다. 수학교사는 똑같은 질문을 다시 던진다. 한 학생이 대답한다. 저희는 이제 정답을 알고 있잖아요. 수학교사가 말한다. 틀렸다. 두 아이는 함께 굴뚝 청소를 했다. 하나만 더럽고 다른 하나는 깨끗하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어서 수학교사는 뫼비우스의 띠에 대해 생각해보자고 한다. 안과 겉, 내부와 외부를 구분할 수 없는 곡면에 관해. 그렇게 많이 읽었건만, 얼마 전까지 나는 이 단편의 통합적이고 자기반성적인 경향이 《난쏘공》 전체와는 이질적이라고 여겼더랬다. ‘난장이들’을 지지하고 졸부자본주의 군부독재 체제를 증오하는 작가와 작품의 목소리는 이 작품의 미학적 완성과 ‘작가의 말’의 아름다움과는 별도로 무섭도록 단호해서다.
《대반열반경》 속 부처의 죽음 직전 모습은 인상적이다. 그는 울고 있는 제자들을 타이른다. “슬퍼하지 마라. 내가 늘 말하지 않았더냐. 세상 모든 것들은 변하고 소멸한다고. 변하고 소멸해야만 하는 모든 것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독문과 대학원 시절 문예이론 교수님의 제안으로 그날 수업은 존 케이지를 비롯한 전위예술가들의 작품이 초청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됐다. 관람을 마친 우리는 카페에 둘러앉아 토론을 했고, 나는 이런 견해를 피력했다. “저 작품들은 전위예술이 아닙니다. 유럽과 영미에서 등장했던 당시에는 아방가르드 혹은 프로그레시브였겠지만, 한국 국립현대미술관에 놓인 현재는 클래식이거나 화석이기 때문입니다.” 예술이 이럴진대, 인간사를 즉각 반영하는 ‘정치’의 외양과 내용이 고정불변할 리 만무하다. 만약 그런 게 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고, 결국 ‘가짜’라는 소리가 된다.
조세희는 ‘작가의 말’에 이렇게 썼다. “제일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악’이 내놓고 ‘선’을 가장하는 것이었다. 악이 자선이 되고 희망이 되고 진실이 되고, 또 정의가 되었다.” 이 문장이 요즘은 어떻게 읽히는가? 소금이 맛을 잃으면 흰모래가 되는 것처럼, 진보의 영혼은 부패와 타락을 알아차리는 순간 어딘가 다른 몸으로 자리를 옮겨버린다. 우리는 ‘변화’ 자체에 집중하고 그것을 실체로 삼으며 살아야 한다. 인간은 안과 밖을 구분하지 못하는 뫼비우스의 띠를 따라서 변하며 여행하다가 사라지는 존재다. 《난쏘공》은 《탈무드》의 ‘굴뚝 속의 두 형제’를 변용한 ‘뫼비우스의 띠’ 때문에 오히려 이 시대에도 생명력을 지닌다. 작가의 ‘무의식적 의도’와 문학작품의 진실은 이러한 예언적 기능으로 스스로를 갱신한다. 자유주의자는 이 ‘아수라’ 같은 나라에서 숨 쉴 구석이 없지만, 더 이상 진보가 아닌 것을 아니라고 지적할 자유는 권리이자 용기다.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인간이라는 속물은 남한테 속는 것보다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남의 거짓말보다 자기 거짓말을 더 믿고 사는 것이다.” 한 굴뚝에서 내려온 재투성이임에도 불구하고 너의 얼굴만 더럽다고 비난하는 우리 허깨비들에게 ‘뫼비우스의 띠’의 수학교사도 《탈무드》의 랍비도 미처 해주지 못한 얘기가 있다. 너와 나는 ‘합심해’ 저 굴뚝을 ‘청소’하려고 들어갔던 거라는 바로 그 사실 말이다. 사라진 진보는 대체 어디에, 누구의 가슴 속으로 자리를 옮겼는가? 오늘 우리 앞에서, 누가 진보의 인형탈을 뒤집어쓴 ‘반동’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