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세계관 만들어 낸 정진수
유아인, 신들린 연기력 인정받아
"최소한의 등장, 최대 효과 항상 바랐던 부분"
정진수는 '지옥' 속 시민들을, 유아인은 '지옥'의 시청자를 홀렸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지옥'은 예고 없이 등장한 지옥의 사자들에게 사람들이 지옥행 고지를 받는 초자연적 현상이 발생하고, 이 혼란을 틈타 부흥한 종교단체 새진리회와 사건의 실체를 밝히려는 이들이 얽히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매 작품 뇌리에 남는 강렬한 캐릭터를 선보여온 유아인이 세상이 혼란해진 틈을 타 부흥한 새진리회의 의장 정진수로 진가를 발휘했다.
연상호 감독은 정진수에 대해 "유아인이란 배우를 통해 완성될 필연이 있었다"면서 신뢰를 보여줬고, 정진수가 극 중반부에 죽음으로 하차했을 때 시청자들은 충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진수는 '지옥'이라는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죽음이 공개된 후에도 초상화로, 동상으로, 등장했을 정도.
연출자인 연상호 감독은 동명의 원작 웹툰을 그리기도 했다. '지옥'은 웹툰을 영상으로 옮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유아인은 자신만의 색으로 정진수를 표현하면 원작을 뛰어넘는 캐릭터를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 '지옥'을 어떻게 봤을까.
연기를 하는 입장에서 제가 출연한 작품의 경우 정상적인 감상이 불가능한데, 이번에는 몰입이 가능했다. 자연스럽게 캐릭터에 빠져들었고, 끝까지 봤다.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을 통해 전회차가 공개되고, 몰아보기를 할 수 있어서 그랬던 부분이 있다.
'지옥'은 공개 24시간 만에 넷플릭스 세계 인기 순위 1위에 오르는 등 인기를 얻고 있다.
1등하니까 좋다. 배우로서 이런 느낌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이걸 어떻게 소화해야할지 생각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우리가 만든 작품이 월드와이드로 공개되고, 지지를 받는다는 게 반갑고 고마운 거 같다. 작품의 해석, 평가가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좀 더 폭넓은 사람들의 피드백을 얻고, 반응을 살필 수 있다는 점도 고무적인 거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평이 있을까. 연기력 극찬도 쏟아지고 있는데.
요즘 너무 기분이 좋다. 제일 기분이 좋았던 건, 외국분들 반응도 좋고 재밌었지만 한국분이 유튜브 댓글로 달아준 건데 '그래, 세계 무대에 내놓으려면 유아인이 제격이지' 이 말이었다. 국가대표가 된 듯한 느낌도 들고, 기분이 좋고, 부담도 된 기억이 있다.(웃음) 연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잘한다'고 박수를 많이 쳐 주셔서, 저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다는 부담감도 생겨났다. 조금도 빈틈의 허용하지 않는 듯한 관객들의 칼날같은 시선도 느껴져서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위험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한다. 단순히 '좋은 연기'에 대한 연구 뿐 아니라 '유아인의 이미지'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저에 대한 선입견, 기대감을 가진 사람들과 어떤 호흡을 만들어가야 할까 생각한다.
'지옥'이 다소 어려운 주제에도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전혀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패션, 헤어스타일과 마찬가지로 작품의 소재도 단기적으로 유행을 타는 것들이 있다. 유행을 타면서도 장기적으로 이어지지 않는 소재들이 있는데, 지옥과 천국은 영원불멸한 소재라 생각했다. 수도 없이 해석되고 표현되고, 메타포로 사용됐을 지옥을 연상호라는 창작자가 만들어낸다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면서 참여했다. '지옥'을 어렵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인터넷 화면, 전쟁을 치르는 세상의 현상을 풍자일 수 있고, 정치판에 대한 풍자일 수 있고, 검증되지 않은 정보를 맹신하고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것도 너무 쉽게 볼 수 있지 않나. 어렵고 꼬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굉장히 현실적이고, 이 시대를 표현해낸다고 봤다.
'지옥'에서 어떤 현실이 겹쳐보였나.
'지옥'이 오픈된 지 한시간도 안되서 6부를 다 본 척 악플을 다는 사람들이 있더라.(웃음) 그런 믿음과 신념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공포를 느꼈다. 세상에 어떤 역할을 하고 싶어 그런 행위를 하는 걸까. 한번 스쳐 지나가는 걸로 마침표를 찍어가며 판단하고, 유튜브에서 5분 본 걸 맹신하고, 타인에게 믿음을 강요하기도 한다. 그런 생각들을 '지옥'을 하면서 했다. 연상호 감독께서 가장 마음에 가는 캐릭터로 정진수를 꼽았다. 그러면서 유아인 배우가 정진수 캐릭터를 예민하게 포착하고 섬세하게 표현해줬다고 말했다. 어떻게 정진수 캐릭터에 접근했는지, 과정이 궁금하다.
실제로 사이비 종교를 많이 찾아 봤다. 조근조근하게 말하더라. '믿습니까' 이런 사람이 없더라. 그런 사람들이 정진수 같아서 소스를 따왔다. 진수는 출연 분량에 비해 극도의 긴장감을 만들어내야했다. 장르적인 표현이 이뤄져야 하는 인물이다보니 그 수위를 어떻게 가져가야할지 고민됐다. 선이 굵은 캐릭터이고, 붕붕 뜬 느낌이더라. 다른 캐릭터는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데, 진수는 왠지 떠 있었다. 그런 차이를 두면서 어떻게 조화롭게 표현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현장에서도 적절히 제가 끼어들 자리, 균형을 생각하며 연기했다.
정진수는 작품 초반 '지옥' 초반의 세계관을 형성해 나가는데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캐릭터를 즐기면서도 '못해내면 어떡하나'라는 걱정도 했다. 자연스럽게 서사가 쌓이고 몰입감을 만들어내기 어려운 역할이었다. 최소한의 등장으로 최대치의 효과를 만들어내야 했다. 정진수는 미스터리해야 하니까. 그러면서 극 전체에 마수를 뻗친다는 분위기를 만드는 게 쉽진 않았다. 평소 작업보다 훨씬 긴장했다. 각 장면마다 목표로 하는 미션을 반드시 성취해야 했고, 웹툰 원작이 있는 작품이다보니 선을 지키면서도 그 선을, 한계를 넘고 싶었다.
원작 웹툰은 봤나.
감독님을 만나뵙고, 시나리오를 읽고 봤다. 자세히 보진 않았다. 원작 작품을 꽤 많이 했는데, 원작이 있기 때문에 영상화가 가능하지만 표현하는 사람들, 창작자 입장에서는 족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원작을 벗어날 수 없는 거다. 보다 적극적으로 자유롭게 해석하고 싶어도 원작의 팬에게 허락 받아야만 가능할 거 같고. 그 표현이 성공적인 연기로 구현되지 않는다면, 연기의 실패가 아니라 원작 팬에게 어마어마한 실망을 안기는 실패라 부담감이 있었다. 그 부담을 떨치기 위해 원작을 보고 연구하기 보단 원작을 멀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항상 작품에 임하고 있다.
그럼 정진수를 만들기 위해 참고한 작품이 있을까.
없다. 하나의 작품을 위해 참고할 것들를 선명하게 삼진 않는다. 책, 영화, 드라마 뭐가 됐든 그동안 제가 접한 모든 것들이 그 자체로 레퍼런스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이비 종교의 수장도 제가 찾아보기도 하지만 이전까지 봐 왔던 것들이 있지 않나. 그런 정보들 속에서 전 어떤 색을 찾아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했던 거 같다.
개인적으로 정진수라는 인물이 너무 빨리 죽어 놀랐다. 시즌2가 제작된다면 정진수도 부활할 수 있을까.
적게 일하고, 최대치 효과를 낼 수 있는 역할이 오면 '올 게 왔다' 이러면서 도전하는 거 같다. 아쉬워해주셔 감사하고, 그 아쉬움 너머에 저 역시 저의 재등장을 바라는 사람 중 하나다. (시즌2에서) 살아날 거 같지 않나.(웃음)
정진수가 출연하지 않은 부분을 봤나.
3번 밖에 안 봤다.(웃음) 사람들은 6회를 1부, 2부로 나눠 말씀하시더라. 초반에는 많이 불안해하고,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하시다가 3회쯤 가서는 충격에 빠지기도 하고, 굉장히 격정적으로 흘러간다. (정진수가 죽은 후인) 4회부터는 굉장히 안정적인 드라마로 느껴지더라. 인간과 괴물들의 이야기, 괴물들의 디스토피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인간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준 거 같더라.
연상호 감독과 작업은 어땠나.
감독님은 새로운 세계를 펼쳐 보이지만 현실에 한 발자국을 담그고 끊임없이 조율하더라. (작품 속 세계관이) 현실과 다른 세계고 황당하지만,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세계를 그려낸다는 점이 연상호 감독님이 만들어내는 '연니버스'의 힘인 거 같다. 작업하면서 강해보이지만 연약한 분 같더라. 제가 강하니까 옆에서 제가 돕고 싶었다.(웃음)
실제로 정진수처럼 '20년 뒤 죽는다'는 고지를 받으면, 개인 유아인은 어떻게 행동하거나, 어떤 삶을 살았을까
고지를 받진 않았지만 전 20대를 그렇게 살았다. 서른되면 죽겠다는 생각으로.(웃음) 그러면서 진수와는 조금 달랐지만, 좀 더 과감하게 저를 던지고, 실험하며 살아갔던 거 같다. 10년이 아니라 내일 죽어도 상관없을 정도로 살았다. 다음이 없을 정도로 매일매일 에너지를 발산했다. 지금은 잘살겠다고 꾸역꾸역 살아가는데, 정진수를 보며 그 당시 저의 치기를 다시 돌아본 거 같다. 정진수 의장 역할이 유아인 배우의 필모그래피에서 어떤 의미로 기억되길 바라나.
기억하고 싶은대로 기억해주시면 된다. 개인적으로는 '사도'나 '베테랑'과 같은 선굵고 강렬한 캐릭터를 맡으며 사랑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저를 프레임에 가두는 선입견을 만드는 작품이기도 했다. 그래서 다른 실험, 시도를 하면서 저의 가능성을 엿보는 시간을 가졌다. 정진수라는 독특하고 강한 에너지를 가진 인물을 연기하면서 업그레이드된, 레벨업 버전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더 미친 연기다' 이런 차원이 아니라, 한 배우로서 스스로 성장을 그리는 과정으로 저를 받아들여주셨으면 좋겠다는 희망은 갖고 있다.
세계무대엔 유아인이 제격이지'라는 평처럼 한국 크리에이터들이 세계무대에서 활동하면서 지켜야 할 덕목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너무 크게 의식하지 않는게 중요한 거 같다. 하던대로. 영화 한 편에 1000만 관객이 들면, 그 공식을 따라 100편의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나. 그런걸 지양해야 할 거 같다. 콘텐츠 창작자의 핵심을 훼손하지 않고, 잘 만들어낸다면 운 좋다면 1등을 하고, 운이 좋지 않아도 회자될 거다. 저 역시도 세계 무대를 향한 연기, 내수 시장 연기가 다르지 않다. 달라야 할 이유도 없고. 연기의 핵심을 지키면서 가려 한다.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