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권 고려대 교수가 쓴 신간 '조선의 살림하는 남자들'
"장 담그고 재테크한 양반…조선 남성은 살림꾼이었다"
"여종 강비의 남편 한복이 그물을 가지고 연못에 가서 고기를 잡아 붕어 17마리를 얻었기에 저녁밥 지을 쌀을 주고 바꿨다.

다음 날에 다시 잡으면 식혜를 담갔다가 한식 제사에 쓰련다.

"
조선시대 학자인 오희문(1539∼1613)은 임진왜란 시기에 쓴 일기인 '쇄미록'에 이 같은 기록을 남겼다.

그는 장을 담그기도 했는데 오늘날 메주에 해당하는 말장과 소금의 비율을 상세히 적어놓았다.

장 담그기는 기행문 '열하일기'로 유명한 조선 후기 인물 연암 박지원(1737∼1805)도 했다.

박지원은 부인이 세상을 떠난 뒤 홀로 자식을 뒷바라지했다.

그런데 그가 자식들에게 쓴 글을 보면 상당히 다정했던 듯싶다.

박지원은 여러 물건을 부치면서 "고추장 작은 단지 하나 보낸다.

사랑방에 두고서 밥 먹을 때마다 먹으면 좋을 것이다.

내가 손수 담근 건데, 아직 푹 익지는 않았다"고 했다.

문헌을 보면 조선시대 양반 남성은 살림에 문외한이지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살림에 참여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정창권 고려대 교수가 내놓은 신간 '조선의 살림하는 남자들'(돌베개 펴냄)은 이처럼 집안일에 매진한 조선 남성을 소개한 책이다.

저자가 주목한 인물인 오희문은 장 담그기 외에 닭을 기르고 양봉도 했다.

그는 쇄미록에서 "밤마다 고양이가 침입하니 함정을 만들어 잡으려 했으나, 틀이 없어 설치하지 못하니 분함을 이길 수 없다"고 털어놨다.

양반 남성은 재산 증식, 즉 재테크에도 관심을 나타냈다.

유희춘(1513∼1577)이 남긴 '미암일기'를 보면 유배에서 풀려난 뒤 농지를 사들인 이야기가 나온다.

유희춘 부부는 1568년부터 1575년까지 다섯 차례 땅을 샀다.

대금은 쌀이나 콩 등으로 치렀는데, 심지어 빚을 내서 논을 구매하기도 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생계 수단으로 뽕나무 재배를 권장했다.

그는 아들에게 부친 편지에서 "뽕나무를 심어서 누에 치는 일은 선비로서의 명성을 잃지 않으면서 큰 이익도 얻을 수 있으니 세상에 또 이러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라고 했다.

이 밖에도 저자는 자녀와 손자 교육, 정원 가꾸기 등에 나선 양반들의 활동상을 흥미롭게 전한다.

저자는 "조선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집 안에서 자급자족하던 가족 사회였다"며 "조선시대 양반 남자는 수많은 집안 살림에 참여했고, 만약 그러한 일을 조금이라도 등한시하면 부부싸움의 큰 원인이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조선시대 사람들은 국가보다 집안을 우선시했고, 남자의 모든 바깥 활동은 궁극적으로 여자의 안살림을 지원하는 차원에서 이뤄졌다"며 "이제는 남녀가 자유롭고 공평하게 사회 활동과 집안 살림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60쪽. 1만5천 원.
"장 담그고 재테크한 양반…조선 남성은 살림꾼이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