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전통술의 기본은 곡물로 만든 발효주다.
막걸리나 약주처럼 곡식과 누룩, 물을 섞어 발효시켜 만든 술이 주류를 이룬다.
이 발효주를 증류해 만든 것이 증류식 소주다.
발효주는 증류주에 비해 순하고 부드럽다는 것이 장점이다.
하지만 알코올 도수가 낮아 상온에서는 쉽게 변질된다는 단점이 있다.
냉장 시설이 없던 옛날에는 더운 여름철 발효주를 빚어 두고 마시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런 발효주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빚었던 술이 과하주다.
◇ 더운 여름을 견디는 술 '과하주'
지날 과(過), 여름 하(夏), 술 주(酒). 이름 그대로 여름을 지날 수 있는 술이다.
막걸리나 약주가 발효하는 도중에 알코올 도수가 높은 증류주를 넣어 술이 상하지 않고 더운 날씨를 견딜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만든 과하주는 도수가 높으면서도 달콤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발효가 한창 진행되는 도중 첨가한 증류주가 효모의 활동을 중단시키면서 미처 알코올로 분해되지 못한 곡물 속 당 성분이 술 안에 남기 때문에 감미료 없이도 달콤한 맛을 낸다.
서양에도 이와 비슷한 술이 있다.
포르투갈의 포트 와인, 스페인의 셰리 와인 같은 주정강화와인이 그것이다.
모두 일반 와인에 증류주인 브랜디 원액을 넣어 저장성을 높인 술이다.
포트 와인은 프랑스와 영국 간 백년전쟁에서 비롯됐다고도 볼 수 있다.
백년전쟁 이후 프랑스 보르도가 영국의 속령에서 벗어나자 영국의 와인 수입상들은 보르도를 대신할 와인 산지를 찾아 나섰고, 17세기 무렵 포르투갈 북부 항구도시 포르투를 발견했다.
하지만 길어진 운송 거리가 문제였다.
포르투에서 런던까지 운반하는 도중 와인이 상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
이를 위해 와인에 도수 높은 브랜디를 넣었고, 여기서 포트 와인이 유래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과하주를 언제부터 만들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하지만 1670년 '음식디미방'이라는 문헌에 과하주 제조법이 언급된 것을 보면 그 전부터 과하주를 만들어 마셨을 것으로 추정된다.
과하주를 만드는 여주 술아원의 강진희 대표는 "문헌상 기록들을 보면 과하주가 서양의 포트 와인보다 100년쯤 앞선 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과하주는 육당 최남선이 1946년 발간한 '조선상식문답'에도 등장한다.
최남선은 당시 전국적으로 유명한 술로 감홍로, 이강고, 죽력고를 들면서 경성의 과하주와 면천의 두견주를 '시기적으로 좋게 치는 술'로 꼽았다.
일제강점기 우리 술을 조사한 '조선주조사'에도 과하주가 조선의 음료로 소개된 것을 보면 당시 꽤 대중적으로 마셨던 것으로 보인다.
◇ 전통주의 최고봉 '과하주'를 되살리다 여주의 술아원은 일제강점기 이후 오랫동안 잊힌 채 문헌에만 남아있던 과하주를 되살린 양조장이다.
평범한 전업주부였던 강진희 대표는 취미로 양조를 배우면서 접한 과하주에 매료돼 2015년 직접 양조장을 차렸다.
그는 "발효주의 기본인 막걸리부터 막걸리를 맑게 걸러낸 약주, 이를 증류한 증류식 소주까지 다 만들 수 있어야 하고, 이것들을 잘 조합해야 맛을 낼 수 있는 술이 과하주"라며 "전통주의 최고봉이라 할만한 술"이라고 소개했다.
지난해 신축 이전한 양조장은 여주IC 인근에 있다.
두 개 동으로 이뤄진 벽돌 건물 안에 양조장과 함께 체험공간과 시음공간을 갖추고 있다.
양조장 안에서는 술 빚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찹쌀로 갓 지은 고두밥의 구수한 내음이 건물 안에 가득하다.
술아원에서는 여주산 찹쌀과 국내산 누룩을 이용해 과하주를 빚는다.
특이한 것은 누룩을 그대로 넣지 않고, 액체 형태의 '수곡'을 만들어 쓴다는 점이다.
수곡은 면포에 넣은 누룩을 물속에 넣고 짜내는 방식으로 만든다.
수곡을 쓰면 누룩취를 최소화하면서 발효 효과는 극대화할 수 있다고 강 대표는 설명했다.
뜨거운 고두밥을 펼쳐 식힌 다음 면포에 넣어 짜낸 수곡을 넣고 손으로 치대는 것으로 과하주 양조가 시작된다.
수많은 양조 과정 중 가장 고된 작업이다.
고두밥과 수곡 외에 물이 추가로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기계를 쓰지 못하고 모두 수작업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고두밥과 수곡으로 빚은 단양주를 일주일에서 열흘가량 발효시킨 다음 주정이나 증류주를 넣고 12도가량의 저온에서 보관한다.
이때는 발효가 완전히 끊기지 않고 조금씩 일어나는 상태라고 한다.
이렇게 한 달에서 한 달 반가량 저온에서 천천히 발효시킨 다음 술을 맑게 거르고 다시 더 낮은 온도에서 숙성시키면 과하주가 완성된다.
술아원에서는 주정을 넣어 숙성한 과하주 '술아'와 직접 내린 증류주를 넣은 '경성과하주'를 선보이고 있다.
'술아'는 봄의 꽃인 매화를 넣은 매화주, 여름꽃인 연꽃과 연잎을 넣은 연화주, 가을꽃인 국화를 넣은 국화주, 꽃을 넣지 않고 찹쌀로만 빚은 순곡주로 나뉜다.
강 대표는 "과하주는 여름에만 만들거나 여름에만 마시는 술이 아니라 여름을 지나 장기간 숙성할 수 있도록 만든 술"이라며 "사시사철 즐길 수 있는 술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계절별로 꽃을 넣은 제품을 출시했다"고 설명했다.
◇ 섬세한 향, 깊은 맛
지난해 선보인 경성과하주는 옛 기록에 가장 충실하게 만든 과하주다.
경기미로 직접 빚은 증류주를 넣어 8개월가량 숙성시킨다.
경성과하주를 따라 한 모금 입에 넣으니 은은한 꽃향기와 함께 묵직한 단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감미료 없이 찹쌀에서 우러나온 깊은 단맛이 약간의 산미와 어우러져 긴 여운을 남긴다.
약주와 증류주가 만나 숙성되는 과정에서 두 술이 갖고 있지 않던 섬세한 향과 깊은 맛이 새로 탄생한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양조장 한쪽에는 와이너리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오크통이 쌓여 있었다.
오크통에 넣어 3년 이상 숙성시키는 프리미엄 과하주를 준비 중이라고 한다.
술아원에서는 과하주 외에도 고구마 증류주 '필'과 복분자를 넣은 약주 '복단지'를 생산하고 있다.
모두 우리나라에서 예로부터 빚어왔던 전통주지만, 지금은 흔히 접하기 힘든 술이다.
'복단지'는 쌀로 빚은 약주에 직접 재배한 복분자를 으깨 넣어 숙성시켜 만든다.
복분자가 들어가 과실주 같지만, 쌀이 주원료인 약주다.
와인과 비슷한 맛과 향을 느낄 수 있다.
고구마 증류주는 여주산 고구마(90%)와 쌀(10%)을 넣어 빚어 증류한 다음 2년간 숙성시켜 만든다.
국내 고구마 소주 마니아들 대부분이 일본에서 수입한 고구마 소주를 마시는데 문헌을 보면 우리나라에서도 옛날부터 고구마로 소주를 빚어 마셨다고 한다.
강 대표는 "막걸리뿐 아니라 과하주나 고구마 소주 같은 다채로운 전통주가 있다는 것을 널리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1년 7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