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낙중 전북대 교수, 논문서 주장…"부여 재정비 맞물려 익산 성격 변화"
"익산 왕궁, 의자왕 때 사찰로 변화…천도는 이뤄지지 않아"
익산은 과연 백제의 네 번째 수도였을까.

백제는 익산으로 수도를 옮기는 천도를 단행한 적이 있을까.

학계에서 오래된 논쟁거리이지만, 명확히 결론이 나지 않은 물음이기도 하다.

문화재청은 사적 '익산 왕궁리 유적'에 대해 "백제 무왕의 천도설이나 별도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이 전한다"고만 설명할 뿐, 성격에 대해 명확히 기술하지 않았다.

김낙중 전북대 교수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간하는 학술지 '문화재' 최신호에 기고한 논문에서 "익산 왕궁은 의자왕 무렵 사찰로 바뀌었고, 익산으로의 천도는 달성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기와를 분석해 익산 왕궁이 불교 사원으로 변경된 시점을 살폈다.

왕궁리 유적은 발굴조사를 통해 7세기에 궁성 축조가 시작됐고, 10세기 무렵 폐기됐을 것으로 추정됐다.

김 교수는 "왕궁리 유적 사원은 목탑, 금당(金堂·본존불을 모신 건물), 강당(講堂, 설법하는 건물)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돼 있다"며 "금당터 기단에서 나온 유물 중에 백제 이후 물품이 없으므로 금당은 백제 때 축조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이어 금당터와 강당터 주변에서 발견된 명문(銘文, 금석에 새긴 글자) 기와를 봐도 사찰이 건립된 시기는 백제 말기라고 강조했다.

또 이 사찰이 주변 쌍릉의 주인이라고 알려진 무왕(재위 600∼641)의 명복을 빌기 위한 절인 원찰(願刹)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여 익산 왕궁은 무왕 말년에 이미 위상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641년 의자왕이 즉위한 뒤 사찰이 세워진 것으로 판단된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김 교수는 익산의 성격 변화와 맞물려 사비(부여) 재정비가 이뤄졌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그는 "사비 도성은 무왕 때 대홍수 등을 겪으며 도시 체계를 다시 수립해야 할 필요성이 증대됐고, 그에 따라 시가지가 확대됐다"며 "익산 기반 세력의 약화 등 정치세력 재편과 맞물려 익산 경영 방식이 바뀌었고 사비 재정비도 본격화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말년의 무왕이나 무왕 사망 직후의 의자왕은 익산에 사찰이 의미하는 신성을 부여해 사비와 차별을 둔 것으로 짐작된다"고 추론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