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 용사 "인물화 그릴 때 치열한 전투 한창…하루 100명씩 희생되기도"
유족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국가 위해 헌신한 노력 알아줘서 고마워"
이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은 이는 열아홉 살의 젊은 화가였다.
국방부 정훈국 소속 종군 화가였던 그는 1951년 10월 말 고지 점령을 놓고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던 금성지구(철원 일대) 최전선을 찾아 6사단 19연대 소속 장병 10인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다.
그의 이름은 김성환. 독재와 부패를 신랄하게 비판한 시사풍자만화 '고바우 영감'을 45년간 연재하며 시사만화계의 거장으로 거듭나기 전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김성환 화백이 그린 10점의 인물화와 그 주인공은 세월과 함께 잊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림이 그려진 지 69년이 흐른 지난해. 전쟁통에 미처 무공훈장을 전달받지 못한 3인의 영웅과 그 가족들은 이 인물화가 인연이 돼 늦게나마 훈장을 받고 참전용사의 명예를 드높일 수 있었다.
◇ 70년 전 '고바우 영감'이 그린 인물화, 무공훈장과 함께 돌아오다
어린 나이에 미술에 재능을 보인 김성환 화백은 1949년 17세라는 젊은 나이에 '연합신문'에 만화를 투고하며 데뷔했다.
당시 서울 경복중학교 학생이던 김 화백에게 신문사는 만화를 계속 그려주면 학비를 지원하겠다고 했다.
이듬해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졌다.
한강 인도교가 폭파된 탓에 피난을 갈 수 없었던 그는 사흘 만에 서울이 북한군에 점령되자 징집을 피해 다락방에 숨었다.
김 화백이 군과 인연을 맺은 것은 같은 해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고 나서였다.
서양화가 김병기의 추천으로 국방부 정훈국 미술대에 근무하게 됐고, 1951년부터는 정훈국 소속 기자로 활동했다.
최전선을 누비던 그는 1951년 10월 29일 6사단 19연대 1대대를 취재차 찾았다.
이곳에서 그는 참호를 지키는 병사들과 중공군 포로들의 모습, 전장의 풍경 등을 세밀하게 화폭에 옮겨 담았다.
당시 대대장이던 임완식 소령을 비롯해 전투에서 공을 세운 ▲조재형 중사 ▲박근영 중사 ▲권두혁 중사 ▲서주선 하사 ▲양만식 하사 ▲이동훈 일병 ▲정만득 일병 ▲안기호 일병 ▲박영준 일병 등 10명의 인물화를 남겼다.
이들의 인물화는 2007년 김 화백이 일본에서 출간한 '조선전쟁 스케치'를 통해 소개됐지만 국내에서는 주목받지 못했다.
이 인물화가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은 김 화백과 한 연구자의 우연한 만남 덕분이었다.
지난 2017년 독립운동에 관한 연구를 하던 육군군사연구소 김상규(40) 박사가 김 화백을 찾아갔다.
독립운동을 했던 김 화백의 부친 김동순 선생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였다.
김상규 박사는 "육군군사연구소에서 왔다고 말하니 자연스레 김 화백도 종군화가였던 사실을 얘기했다"며 "인터뷰 후에 김 화백이 화보를 보여줘 이 인물화를 처음 접하게 됐다"고 말했다.
계급과 이름이 그림에 기록돼 있어 당사자들을 충분히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 김 박사는 "인물화 속 주인공을 찾아 그림의 복제본을 전달하면 당사자와 그 후손에게 큰 의미가 되지 않겠느냐"며 김 화백을 설득했다.
김 화백이 흔쾌히 동의하자 그는 직접 이들을 찾아 나섰다.
이들의 병적기록을 찾는 것까지는 순조로웠다.
하지만 타인의 정보에 개인이 마음대로 접근하는 것을 막는 개인정보보호법으로 인해 인물화 속 10인의 장병이나 그 후손들이 어디에 사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사이 2019년 8월 김 화백이 세상을 떠났다.
김 박사는 당시를 회고하며 "반드시 인물화를 전하겠다는 약속을 김 화백에게 했기 때문에 (별세 소식에) 충격을 받았다"고 전했다.
해결의 실마리가 풀린 것은 육군군사연구소에서 김 박사와 함께 근무했던 '6·25 무공훈장 찾아주기 조사단' 소속의 한 장교 덕분이었다.
조사단과 김 박사가 협업해 지난해 5월부터 병적기록과 인물화를 토대로 추적한 결과 8월까지 10명 중 9명의 소재를 찾아낼 수 있었다.
지난 2019년 창설된 6·25 무공훈장 찾아주기 조사단은 6·25 참전용사 중 무공훈장을 수령하지 못한 이들을 찾아 훈장을 수여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조사 결과 인물화가 그려진 10명 중 9명이 무공훈장 수훈자이고, 이 가운데 3명이 전사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수훈자 9명 중 2명은 아직 무공훈장을 전달받지 못했단 사실도 드러났다.
9명을 제외한 나머지 1명도 무공훈장 서훈이 누락된 것이 확인돼 추가 서훈을 통해 훈장을 수여할 수 있었다.
이들 10명 중 유일하게 생존한 정만득 일병은 직접 그림을 전달받았다.
김 화백이 70년 전 전장에서 그린 그림이 참전용사와 그 후손들에게 값진 기록과 훈장이 돼 돌아온 것이다.
김 화백의 아내 허금자 여사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인물화의 주인공이나 후손을 만나볼 기회가 전혀 없었는데, 이들에게 인물화를 전달할 수 있게 돼 뜻깊고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 유족들 "지금이라도 국가 위해 헌신한 노력 인정해줘서 고마워"
지난해 8월 권오희(48) 씨는 뜻밖의 전화를 한 통 받았다.
국방부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권 씨의 둘째 큰아버지인 고(故) 권두혁 중사의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하게 됐다는 것이다.
기쁜 소식은 하나 더 있었다.
김성환 화백이 남긴 둘째 큰아버지의 인물화를 전달받게 된 것이다.
권 씨는 그림을 처음 봤을 당시를 회고하며 "둘째 큰아버지는 전쟁 당시 전사하셨기 때문에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분이었는지 알 수 없었는데, 그림을 통해 만난 순간 동질감과 가까움을 느꼈다"고 소회를 밝혔다.
권두혁 중사와 함께 참전한 그의 형과 동생도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막내동생으로 전쟁이 일어날 당시 12세의 어린 나이여서 참전할 수 없었던 권 씨의 아버지만 4형제 중 유일하게 전화(戰禍)를 피할 수 있었다.
권 씨에 따르면 3명의 큰아버지에 대한 공식적인 전사 통지도 없었다고 한다.
권 씨의 아버지는 형님 중 한 분이라도 살아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평생 그들을 기다렸다.
권 씨는 "80년대 KBS에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방송을 할 때 평소 TV를 보시지 않던 아버지가 종일 TV 앞을 떠나시지 못하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전했다.
그는 "둘째 큰아버지를 비롯해 아버지 형제분들 모두 미혼인 상태로 참전했다가 돌아오지 못하셨고, 아버지마저도 16년 전 돌아가셔서 가장 가까운 친족인 나한테 연락이 온 것 같다"며 "좀 더 빨리 찾아줬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국가를 위해 헌신한 분들의 노력을 인정해줘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인물화에 담긴 10인 중 한 명인 고 이동훈 일병의 아내 윤의로(88) 씨도 지난해 남편의 모습이 담긴 초상화를 받았다.
70년 전 남편의 모습에 윤씨는 "그림 속 힘들어 보이는 모습에 마음이 안 좋다"며 "그래도 이렇게 나라에서 잊지 않고 초상화까지 찾아주니 고맙다"고 했다.
김성환 화백은 이동훈 일병을 그린 인물화에 그의 중대장이 '어린 병사가 가장 용감하게 싸운다'고 칭찬했다는 기록도 함께 남겼다.
이 일병은 전쟁 중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살아남은 그는 고향인 경기도 양평으로 돌아왔지만, 전쟁 당시 적의 포탄이 근처에 떨어지며 입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1976년 세상을 떠났다.
인물화 속 주인공 10명 중 유일한 생존자인 정만득(90) 씨는 "70년 전이 까마득하게 먼 과거의 일이기에 완전히 잊고 살다가 뜻밖에 당시의 모습을 기록한 초상화를 받아 기분이 좋다"고 밝혔다.
그는 "김 화백이 나를 비롯해 10인을 그려준 때에도 치열하게 고지를 뺏고 뺏기는 전투가 매일 벌어지고 있었다"며 "당시 고지 하나를 점령하려고 하루에 100명씩 희생되는 날도 있었다"고 전했다.
육군군사연구소 김상규 박사는 "인물화에 적힌 이름과 계급 덕분에 70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참전용사와 후손들을 찾을 수 있었다"며 "조사단의 관심과 도움으로 인물화와 훈장을 주인공과 후손들에게 전달해드릴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탐사보도팀: 권선미·윤우성 기자, 정유민 인턴기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