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 몸을 사리지 않는 ‘허슬 플레이’로 이름을 날렸던 라이언 프릴. 그는 2012년 36세의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단순 우울증으로 인한 행동인 줄 알았던 그의 자살은 사후 1년 뒤 만성외상성뇌병증(CTE)에 따른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미국 보스턴대 뇌손상센터는 프릴이 사망 당시 2기 CTE를 앓고 있었다고 했다.

CTE는 반복적으로 뇌에 큰 충격을 받을 때 발생하는 뇌질환으로 기억상실, 정서장애, 우울증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심한 경우 파킨슨병이나 알츠하이머 등 퇴행성 뇌질환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는 명언으로 유명한 권투선수 무함마드 알리도 생전 CTE로 고생하다가 결국 파킨슨병까지 앓았다.

권투, 미식축구, 야구 등 몸싸움이 치열한 운동 경기를 치르는 선수들에게서 주로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일반인에게도 발병할 수 있다. 지난 3월 국제학술지 ‘알츠하이머와 치매’에 실린 연구에 따르면 미국인 1만4000명의 뇌를 분석했더니 한 번이라도 중증 뇌진탕을 겪었다면 치매에 걸릴 확률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25% 높았다.

CTE는 뇌에 변이된 타우 단백질이 축적돼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까지는 마땅한 치료법이 없어 증상을 완화하는 약물로 진행을 늦추는 처방만 이뤄지고 있다. 그런데 최근 호주 연구진이 CTE 진행을 막는 약물을 발견해 국제학술지 ‘사이언티픽 리포트’에 발표했다.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대 연구진은 뇌에 타격이 가해지면 ‘P물질’이 분비돼 비정상적인 양의 타우 단백질을 뉴런 내부에 밀집시킨다고 밝혔다. P물질은 뇌척수와 같은 중추신경계에서 신호를 전달하는 물질이다. P물질은 NK1 수용체에 결합하면서 작동한다. P물질이 열쇠라면 NK1이 자물쇠인 셈이다.

연구진은 P물질 대신 NK1에 결합하는 약물(길항제)을 찾았다. 특정 약물이 NK1에 결합하면 P물질이 NK1에 붙지 못하게 돼 신호전달을 막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마치 자물쇠에 껌과 같은 이물질을 넣으면 열쇠가 작동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연구진은 이 가설을 확인하기 위해 우선 실험동물을 이용해 뇌의 외상이 유발하는 타우 단백질 변이를 확인했다. 그 결과 경미한 타격은 타우 단백질 변이를 초래하지 않았지만, 약하더라도 타격이 반복될 경우 변이가 급증했다. 이는 중증 뇌진탕을 유발하는 한 번의 타격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연구를 주도한 로버트 빈크 교수는 “일상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경미한 타격도 여러 번 지속되면 위험하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말했다.

이어 연구진은 ‘껌’에 해당하는 NK1 길항제를 투여했다. 그 결과 타우 단백질 변이가 눈에 띄게 줄었고, 축적량이 감소했다. 증상도 상당 부분 완화하는 것을 확인했다. 빈크 교수는 “특정 약물로 물질P를 차단하자 타우 단백질 축적이 줄면서 신경학적 문제를 완화했다”며 “추가 연구를 통해 사람 대상의 임상 연구까지 진행되기 바란다”고 말했다.

연구진은 실험에서 사용한 NK1 길항제가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현재 개발된 NK1 길항제로는 구토 예방제로 사용되는 아프레피탄트, 로라피탄트, 카소피탄트 등이 있다.

최지원 기자 jwcho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