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프리즘] '주식회사 한국'의 성공 조건
“앞으로 결재란에 네가 한 사인이 있으면 나는 내용을 안 보고 서명할 것이다.”

한 10대 그룹 총수가 아들인 A사장에게 경영을 맡기면서 한 얘기라고 한다. 본인도 선친으로부터 그렇게 훈련받았다고 한다. ‘자신의 뒤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는 게 경영 수업의 시작이라는 설명이다. A사장은 최근 골프를 끊었다고 한다. 그룹 계열사 최고경영자(CEO)도 비상이다. 새벽에도 A사장의 연락을 받는 일이 많아졌다.

최근 삼성전자의 미국 반도체 투자가 임박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지만, 내부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삼성전자 고위 관계자는 “미국 투자는 결정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다. 투자금이 170억달러, 20조원에 달한다. CEO의 책임 범위를 한참 벗어났다”고 말했다.

다른 그룹도 마찬가지다. “오너는 ‘여기까지 검토했으면 됐다’ 하고 추진하는데 CEO는 계속 검토만 시킨다”고 했다. 또 다른 10대 그룹의 한 CEO는 총수에게 이렇게 직언했다고 한다. “전문경영인이 할 수 있는 건 ‘검토’까지입니다. 결정은 당신 몫입니다.”

대규모 인수합병(M&A)이나 투자뿐만 아니다. 23분기 연속 적자로 5조원의 누적 손실이 쌓인 LG전자의 스마트폰 사업 철수 역시 총수 결단 이외에는 설명이 안 된다. 만 6년 가까이 적자가 계속됐지만, CEO 누구도 사업을 접자는 결론을 내지 못한 것이다.

최근 만난 한 정유업계 CEO도 같은 고민을 털어놨다. “액화천연가스(LNG)가 온전한 산업생태계를 갖추며 상용화되기까지 약 반세기 걸렸다. 수소경제가 임박한 것처럼 떠들지만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이 상황에서 조(兆) 단위 투자를 한다는 건 너무나 큰 리스크다.”

따지고 보면 기업(Enterprise)이라는 단어 자체가 기회와 리스크를 상징한다. 영어의 어원은 접두사 Enter(between)와 라틴어 Prendre(take)의 합성어다. ‘가능성들 사이에서 기회를 잡는다’는 뜻이다. 그렇게 기업은 불확실성과 맞서며 인류 발전의 원동력 역할을 해왔다.

미국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로 ‘코퍼레이트 아메리카(corporate America)’가 있다. ‘주식회사 미국’으로 번역되는 이 표현은 미국의 번영을 상징한다. 예측 가능한 시장,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인프라로 끊임없는 혁신에 도전하는 ‘미국식 경제 발전 시스템’이 담겨 있다. 제너럴일렉트릭(GE)을 비롯해 애플과 구글, 아마존, 테슬라로 이어지는 혁신기업의 출현도 이런 풍토에서 가능했다.

한국 역시 눈부신 경제성장 배경에 기업의 역할이 크다는 점은 미국과 다르지 않다. 다만 ‘코퍼레이트 아메리카’와 달리 ‘주식회사 한국’에는 단기 업적에 매몰되지 않는 총수 체제의 강점이 있다. 총수는 한국의 경영 풍토가 요구하는 ‘무한책임사원’의 중압감을 견디며 선제적인 결단을 통해 위기를 돌파해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일 청와대에서 만난 4대 그룹 대표에게 “기업의 앞서가는 결정이 없었다면 오늘도 없었다”고 했다. 여기에는 미래를 위해 불확실성을 감수한 총수의 결단이 전제돼 있다.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이 이 자리에서 “반도체는 대형 투자 결정이 필요한데 총수가 있어야 의사결정을 신속하게 할 수 있다”고 한 것은 빈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주식회사 한국’이 앞으로도 지속되기 위해선 기업 역할에 맞는 사회적 존중과 자유로운 기업 활동의 보장이 필요하다. 각 기업에 지배구조의 선택권을 인정하는 것은 물론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21일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기자회견에서 미국에 44조원을 투자키로 한 4대 그룹 대표를 일으켜 세워 ‘생큐’를 연발하고 박수를 보냈다. 한국 기업을 ‘코퍼레이트 아메리카’의 일원으로 인정한 것이다. 한국의 기업 총수도 그 이상의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지 않을까. 문 대통령의 발언이 공치사에 그치지 않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