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酒먹방] 춘향이와 이몽룡의 이별주 감홍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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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3대 명주'로 이기숙 명인이 명맥 이어
"토 선생! 용궁에 가면 감홍로도 있다네."
'별주부전'에서 자라는 토끼의 간을 빼앗기 위해 감홍로로 토끼를 유인한다.
'춘향가'에서 춘향이가 이몽룡과의 이별주로 택한 것도 바로 감홍로다.
'질병(질그릇)에도 감홍로'라는 속담도 있다.
겉모양은 보잘것없으나 속은 좋고 아름답다는 뜻이다.
감홍로가 얼마나 귀한 술인지를 보여주는 속담이다.
육당 최남선은 해방 직후 펴낸 '조선상식문답'에서 죽력고, 이강고와 함께 감홍로를 조선 3대 명주로 꼽았다고 한다.
식품명인 제43호인 이기숙 씨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감홍로를 재현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인 아버지 고 이경찬 옹의 뒤를 이어 파주에서 감홍로를 빚고 있다.
한때 사라질 위기에 놓였던 이 술이 지금도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전통주를 원형 그대로 계승하려는 명인의 고집 덕분이다.
◇ 약재를 넣어 우려낸 귀한 술
감홍로(甘紅露)는 글자 그대로 달고 붉은 이슬이라는 뜻이다.
증류할 때 술이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이슬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모든 증류주에 '이슬로'를 붙인 것은 아니다.
임금님이 드셨던, 격이 있는 술에만 '로'를 썼다고 한다.
투명한 빛깔을 띠는 보통의 증류주와 달리 붉은빛을 띠는 것은 술을 증류한 뒤 8가지 약재를 넣어 숙성하기 때문이다.
용안육, 진피, 계피, 방풍, 정향, 생강, 감초, 지초가 들어간다.
이렇게 8가지 약재를 넣는 것이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 전하는 감홍로 주조법이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이 가운데 방풍은 넣지 못하고 있다.
방풍이 의약품으로 분류되면서 술에 넣을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이 명인은 "보통 술을 마시면 몸에 열이 나지만 장을 차갑게 해서 병을 유발한다"며 "하지만 여러 약재가 들어간 감홍로는 몸을 따뜻하게 해줘 옛날에는 약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옛날에는 '내국 감홍로'라고 해서 궁중 의원들이 감홍로를 빚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여러 가지 약재를 들어가는 만큼 감홍로를 빚는 데에는 많은 정성과 인내가 필요하다.
기본 재료는 쌀과 메조. 멥쌀과 메조가 7대 3의 비율로 들어간다.
메조는 흔히 잡곡밥에 넣어 먹는 차조와 달리 찰기가 없고 푸른 빛이 돈다.
아쉽게도 현재 메조가 국내에서 재배되지 않아 수입 메조를 쓴다고 한다.
멥쌀과 메조에 누룩을 넣어 세 차례 빚은 뒤 15일간 발효시킨 다음 두 차례에 걸쳐 증류한다.
증류를 많이 할수록 술의 순도가 높아진다고 한다.
증류한 술에 7가지 약재를 넣어 침출하는 데 또 두어 달이 걸린다.
그런 다음 약재를 걸러내고 1년 반에서 2년가량 숙성시켜야 비로소 감홍로가 완성된다.
◇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장인의 고집
이 명인은 아버지가 술 빚던 방식을 최대한 그대로 재현하려 한다.
불을 때서 증류시키는 화덕식 증류기를 쓰는 것도 이 때문이다.
"화덕식 증류기를 쓰면 지게미가 가라앉아 술에서 화덕 냄새가 날 수도 있어요.
예전 사람들은 이걸 즐겼는데 시류가 바뀌어 요즘 사람들은 그리 좋아하지 않죠. 하지만 아버지가 하던 방식을 최대한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저는 이런 방식을 고집하고 있어요.
감압식 증류기를 쓰면 탄 냄새도 안 나고 훨씬 더 편하긴 해요.
제 다음 대에는 이렇게 바뀔지도 모르겠죠. 하지만 적어도 저는 이 방식을 고집하고 싶습니다.
" 증류한 술에 물을 타지 않는 것도 아버지의 방식이다.
그는 "보통 술을 증류하면 알코올 도수 78도에서 술이 나오기 시작해서 10∼15도 정도까지 나오기 때문에 물을 타지 않아도 40도가 맞춰진다"며 "요즘 방식대로 68∼70도의 술에 정제수를 타면 술을 만들기도 훨씬 편하고 맛도 좋다고 하지만, 아버지가 보여줬던 그 방식 그대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양조장 한쪽에는 이 명인의 아버지인 고 이경찬 옹이 1980년에 빚은 감홍로와 문배주가 보관되어 있다.
아버지가 이 명인에게 물려준 "마지막 유산"이다.
고 이경찬 옹은 6·25전쟁 발발 전 평양에서 양조장을 운영하면서 문배주와 감홍로를 빚었다.
당시 양조장 운영으로 큰 성공을 거둔 그는 전쟁 뒤 가족을 이끌고 월남해 서울 미아리에 정착했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 양곡관리법 제정으로 쌀로 술을 빚을 수 없게 되고 희석식 소주가 나오면서 양조장을 접었다.
'밀가루로는 술을 빚을 수 없다.
이건 내가 할 일이 아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양조장을 접은 이후 오랜 기간 힘들게 살았던 그는 정부가 전통주 진흥에 나서면서 1986년 전통주 분야 최초로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지정됐다.
이경찬 옹이 작고한 뒤에는 큰오빠인 이기춘 씨와 둘째 오빠인 고 이기양 씨가 각각 문배주와 감홍로를 물려받아 명인으로 지정됐다.
하지만 2000년 둘째 오빠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면서 막내였던 이 명인이 나서게 됐다.
"저처럼 세상을 잘 모르는 사람이 유일하게 잘 아는 그 술을 세상 사람들은 잘 모르시더라고요.
자칫 문헌에만 남아있는 그런 술이 되고 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나의 문화가 사라지는 것이 아쉬웠어요.
아버지가 생각했던 그 가치를 저는 알고 있는데. 후세도 그 가치를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용기를 냈습니다.
"
감홍로를 계승하기로 결심한 이 명인은 2001년 명인 지정을 신청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적 아버지로부터 직접 술 빚는 걸 배웠는데 당시 행적에 대한 근거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일단 법인을 설립하고 2005년 파주에 시설을 갖춰 이듬해부터 감홍로를 만들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강사로 일했던 남편도 직장을 그만두고 나와 이 명인과 함께 술을 만들었다.
이후 지인들의 도움으로 전수 관련 자료를 찾을 수 있었고, 2012년에야 명인으로 지정될 수 있었다고 한다.
용기를 내 감홍로 계승에 나섰지만, 전통주를 만들고 판매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감홍로가 처음 나왔을 때는 정부가 막걸리를 한창 띄우던 시기였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술인데다 도수도 높고 비싸서 사람들이 감홍로는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술을 내놓고 처음 10년간은 1년에 적자가 1억씩 났다.
하지만 그 어려움의 시간은 "아버지와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며 "힘들게 사시면서도 이 술을 지켜낸 아버지를 떠올리며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이 명인은 말했다.
술의 도수를 낮추거나 막걸리처럼 좀 더 대중적인 술을 만들어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할 수 있었고, 하고 싶었다"며 "하지만 아버지를 생각하니까 못 하겠더라. 아버지의 생각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오히려 저는 지금보다 증류 횟수를 더 늘려 높은 도수의 술을 만들고 싶어요.
그게 아버지의 꿈이었거든요.
지금 수입하고 있는 메조도 국산으로 바꾸려고 계획하고 있어요.
과거 국내에서 계약 재배를 시도했다가 도정 기술이 없어 실패한 적이 있는데, 최근 메조를 도정할 수 있는 기계가 국내에 들어왔거든요.
여력이 된다면 쌀도 개량되지 않은 토종쌀로 바꾸고 싶어요.
감홍로의 원형을 제대로 복원하는 게 저의 희망입니다.
제가 애쓰지 않으면 후대에 가서 더 변질될 우려가 크니까요.
"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1년 4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연합뉴스
'별주부전'에서 자라는 토끼의 간을 빼앗기 위해 감홍로로 토끼를 유인한다.
'춘향가'에서 춘향이가 이몽룡과의 이별주로 택한 것도 바로 감홍로다.
'질병(질그릇)에도 감홍로'라는 속담도 있다.
겉모양은 보잘것없으나 속은 좋고 아름답다는 뜻이다.
감홍로가 얼마나 귀한 술인지를 보여주는 속담이다.
육당 최남선은 해방 직후 펴낸 '조선상식문답'에서 죽력고, 이강고와 함께 감홍로를 조선 3대 명주로 꼽았다고 한다.
식품명인 제43호인 이기숙 씨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감홍로를 재현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인 아버지 고 이경찬 옹의 뒤를 이어 파주에서 감홍로를 빚고 있다.
한때 사라질 위기에 놓였던 이 술이 지금도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전통주를 원형 그대로 계승하려는 명인의 고집 덕분이다.
◇ 약재를 넣어 우려낸 귀한 술
감홍로(甘紅露)는 글자 그대로 달고 붉은 이슬이라는 뜻이다.
증류할 때 술이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이슬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모든 증류주에 '이슬로'를 붙인 것은 아니다.
임금님이 드셨던, 격이 있는 술에만 '로'를 썼다고 한다.
투명한 빛깔을 띠는 보통의 증류주와 달리 붉은빛을 띠는 것은 술을 증류한 뒤 8가지 약재를 넣어 숙성하기 때문이다.
용안육, 진피, 계피, 방풍, 정향, 생강, 감초, 지초가 들어간다.
이렇게 8가지 약재를 넣는 것이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 전하는 감홍로 주조법이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이 가운데 방풍은 넣지 못하고 있다.
방풍이 의약품으로 분류되면서 술에 넣을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이 명인은 "보통 술을 마시면 몸에 열이 나지만 장을 차갑게 해서 병을 유발한다"며 "하지만 여러 약재가 들어간 감홍로는 몸을 따뜻하게 해줘 옛날에는 약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옛날에는 '내국 감홍로'라고 해서 궁중 의원들이 감홍로를 빚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여러 가지 약재를 들어가는 만큼 감홍로를 빚는 데에는 많은 정성과 인내가 필요하다.
기본 재료는 쌀과 메조. 멥쌀과 메조가 7대 3의 비율로 들어간다.
메조는 흔히 잡곡밥에 넣어 먹는 차조와 달리 찰기가 없고 푸른 빛이 돈다.
아쉽게도 현재 메조가 국내에서 재배되지 않아 수입 메조를 쓴다고 한다.
멥쌀과 메조에 누룩을 넣어 세 차례 빚은 뒤 15일간 발효시킨 다음 두 차례에 걸쳐 증류한다.
증류를 많이 할수록 술의 순도가 높아진다고 한다.
증류한 술에 7가지 약재를 넣어 침출하는 데 또 두어 달이 걸린다.
그런 다음 약재를 걸러내고 1년 반에서 2년가량 숙성시켜야 비로소 감홍로가 완성된다.
◇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장인의 고집
이 명인은 아버지가 술 빚던 방식을 최대한 그대로 재현하려 한다.
불을 때서 증류시키는 화덕식 증류기를 쓰는 것도 이 때문이다.
"화덕식 증류기를 쓰면 지게미가 가라앉아 술에서 화덕 냄새가 날 수도 있어요.
예전 사람들은 이걸 즐겼는데 시류가 바뀌어 요즘 사람들은 그리 좋아하지 않죠. 하지만 아버지가 하던 방식을 최대한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저는 이런 방식을 고집하고 있어요.
감압식 증류기를 쓰면 탄 냄새도 안 나고 훨씬 더 편하긴 해요.
제 다음 대에는 이렇게 바뀔지도 모르겠죠. 하지만 적어도 저는 이 방식을 고집하고 싶습니다.
" 증류한 술에 물을 타지 않는 것도 아버지의 방식이다.
그는 "보통 술을 증류하면 알코올 도수 78도에서 술이 나오기 시작해서 10∼15도 정도까지 나오기 때문에 물을 타지 않아도 40도가 맞춰진다"며 "요즘 방식대로 68∼70도의 술에 정제수를 타면 술을 만들기도 훨씬 편하고 맛도 좋다고 하지만, 아버지가 보여줬던 그 방식 그대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양조장 한쪽에는 이 명인의 아버지인 고 이경찬 옹이 1980년에 빚은 감홍로와 문배주가 보관되어 있다.
아버지가 이 명인에게 물려준 "마지막 유산"이다.
고 이경찬 옹은 6·25전쟁 발발 전 평양에서 양조장을 운영하면서 문배주와 감홍로를 빚었다.
당시 양조장 운영으로 큰 성공을 거둔 그는 전쟁 뒤 가족을 이끌고 월남해 서울 미아리에 정착했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 양곡관리법 제정으로 쌀로 술을 빚을 수 없게 되고 희석식 소주가 나오면서 양조장을 접었다.
'밀가루로는 술을 빚을 수 없다.
이건 내가 할 일이 아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양조장을 접은 이후 오랜 기간 힘들게 살았던 그는 정부가 전통주 진흥에 나서면서 1986년 전통주 분야 최초로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지정됐다.
이경찬 옹이 작고한 뒤에는 큰오빠인 이기춘 씨와 둘째 오빠인 고 이기양 씨가 각각 문배주와 감홍로를 물려받아 명인으로 지정됐다.
하지만 2000년 둘째 오빠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면서 막내였던 이 명인이 나서게 됐다.
"저처럼 세상을 잘 모르는 사람이 유일하게 잘 아는 그 술을 세상 사람들은 잘 모르시더라고요.
자칫 문헌에만 남아있는 그런 술이 되고 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나의 문화가 사라지는 것이 아쉬웠어요.
아버지가 생각했던 그 가치를 저는 알고 있는데. 후세도 그 가치를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용기를 냈습니다.
"
감홍로를 계승하기로 결심한 이 명인은 2001년 명인 지정을 신청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적 아버지로부터 직접 술 빚는 걸 배웠는데 당시 행적에 대한 근거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일단 법인을 설립하고 2005년 파주에 시설을 갖춰 이듬해부터 감홍로를 만들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강사로 일했던 남편도 직장을 그만두고 나와 이 명인과 함께 술을 만들었다.
이후 지인들의 도움으로 전수 관련 자료를 찾을 수 있었고, 2012년에야 명인으로 지정될 수 있었다고 한다.
용기를 내 감홍로 계승에 나섰지만, 전통주를 만들고 판매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감홍로가 처음 나왔을 때는 정부가 막걸리를 한창 띄우던 시기였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술인데다 도수도 높고 비싸서 사람들이 감홍로는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술을 내놓고 처음 10년간은 1년에 적자가 1억씩 났다.
하지만 그 어려움의 시간은 "아버지와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며 "힘들게 사시면서도 이 술을 지켜낸 아버지를 떠올리며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이 명인은 말했다.
술의 도수를 낮추거나 막걸리처럼 좀 더 대중적인 술을 만들어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할 수 있었고, 하고 싶었다"며 "하지만 아버지를 생각하니까 못 하겠더라. 아버지의 생각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오히려 저는 지금보다 증류 횟수를 더 늘려 높은 도수의 술을 만들고 싶어요.
그게 아버지의 꿈이었거든요.
지금 수입하고 있는 메조도 국산으로 바꾸려고 계획하고 있어요.
과거 국내에서 계약 재배를 시도했다가 도정 기술이 없어 실패한 적이 있는데, 최근 메조를 도정할 수 있는 기계가 국내에 들어왔거든요.
여력이 된다면 쌀도 개량되지 않은 토종쌀로 바꾸고 싶어요.
감홍로의 원형을 제대로 복원하는 게 저의 희망입니다.
제가 애쓰지 않으면 후대에 가서 더 변질될 우려가 크니까요.
"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1년 4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