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매도 금지에 이어 또 시장에 일시적인 마약을 주입한 셈입니다. 뒷감당은 차기나 차차기 정권이 해야죠.”(이찬우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

“동학개미의 수익률을 위해 국민 전체에 리스크를 넘겼습니다. 10~20년 뒤에는 매도해야 하는데 그때 충격은 어떻게 감당합니까.”(이준서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

정부가 지난 9일 이례적으로 ‘원포인트’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를 열어 국내 주식의 투자 허용한도를 늘리기로 하자 연기금 분야 전문가들과 학계의 비판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국민연금은 향후 소진에 따른 충격을 줄이려면 지금부터 국내 주식 비중을 줄여나가야 하는데 오히려 역행하는 꼴이 됐다. 정부의 ‘정치적 판단’으로 미래 세대가 더 큰 부담을 지게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주식 비중 낮춘다더니

기금위에서 통과된 내용은 비교적 간단하다. 전략적 자산운용(SAA)상 국내 주식에 투자할 수 있는 한도를 목표치(16.8%) 대비 ±2.0%에서 ±3.0%로 넓힌 것이다. SAA 범위를 넘기지 않기 위해 추가 매도를 할 필요가 없어지도록 했다. 원종현 국민연금 상근 전문위원은 “이번 결정은 단순히 투자 완충지대(버퍼)를 넓혀 여유를 둔 것으로, 국내 주식의 성과가 더 좋은 상황과 매도 행위로 인한 시장 충격을 고려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같은 조정은 국내 주식의 투자 비중을 줄이기로 한 포트폴리오 조정 방향에 역행한다. 기본적으로 국민연금은 2010년대 들어 위험자산 투자를 늘리되 해외 투자를 늘리는 방향으로 포트폴리오를 짜고 있다. 세계 3위의 ‘큰손’이 세계 주식시장의 0.3%밖에 안 되는 국내 증시에 20% 가까이 투자하는 비정상적 구조를 탈피해야 한다는 지적에서다.

또 다른 이유는 국민연금의 ‘생애주기’ 때문이다. 2010년 국민연금 적립 규모는 약 300조원. 현재는 약 800조원이다. 하지만 적립금 규모가 1400조원에 이르는 2030년이 되면 연금 수입 대비 지출이 더 많아진다. 물론 투자수익이 계속 들어오기 때문에 전체 적립금은 늘어나지만 증가세가 크게 주춤해진다. 그러다가 2042년부터 15년간 가파르게 감소한다. 2018년 재정추계 결과에 따르면 2057년에는 기금이 고갈되고 -124조원을 기록하게 된다.

‘해외 투자 50% 달성’ 어려워져

이런 생애주기 탓에 국민연금은 불과 9년 뒤인 2030년부터 ‘질서있는 퇴각’을 준비해야 하는 처지다. 보건복지부는 2019년 말 해외 투자 비중을 30%(2019년)에서 50%(2024년)까지 올리겠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복지부는 기금위 실무평가위원회에 포트폴리오 조정 이유로 ‘미래 유동성 회수 시 시장 충격 최소화’를 적시했다. 지금은 기금 성장기(연금 수입>지출)이므로 적극적으로 운용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바꿔 말하면 2030년 전에 서둘러 투자처를 다변화해야 향후 전환기와 감소기에 올 충격을 줄이고, 충격 시기도 늦출 수 있다는 뜻이다. 특히 국내 주식시장과 채권시장은 ‘연못 속 고래’ 연금이 방향을 틀면 그 충격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 ‘국민연금으로 인한 대규모 오버행(매도 예상 물량)’을 머리에 이고 사는 형국이 될 것이란 얘기다.

그러지 않아도 미래 세대는 국민연금 납입으로 기대할 수 있는 수익률이 이전 세대에 비해 크게 낮다. 현재 예상되는 연금 고갈 시기(2057년 이후)에 연금을 수령하게 되는 이들은 연금을 내야 할지부터 고민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이들에게 주식시장에 커다란 매물 폭탄까지 넘겨주는 꼴이 될 수 있다.

‘떼법’에 원칙 훼손 전례로 남아

대부분 전문가는 무엇보다 이번 투자한도 변경 결정 ‘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개인투자자들의 압력에 정부가 굴복해 기존에 정해놓은 포트폴리오를 원칙 없이 훼손했다는 게 이유다. 이준서 교수는 “국민연금이 추구하는 것은 ‘수익률 제고’인데, 동학개미가 거론되는 식으로 다른 것을 고려하는 행위 자체가 수익률 제고에는 걸림돌이 된다”고 말했다.

이찬우 전 본부장은 “증시에 들어와 있는 개인투자자들은 국민연금이 증시를 떠받쳐주는 게 좋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국민연금이 한없이 있을 수 없고 결국은 나가야 한다”며 “공매도 금지 결정도 그렇고, 정부가 국가 전체의 장기적인 방향을 따르는 게 아니라 개인투자자들의 눈치를 보고 정책을 짜는 것 자체가 옳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준행 서울여대 경제학과 교수도 “전적으로 전문가에게 맡겨야 할 자산배분을 동학개미들의 요구에 따라 바꾸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며 “전문적인 투자 역량이 최대치로 발휘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할 때”라고 꼬집었다.

이상은/황정환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