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18세기 지식인에게 배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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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부터 글을 읽고 쓰기를 시작한지 어언 50여년이 흘렀다. 그러나 글을 제대로 알고 책 읽기를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이후이다. 그 이전 책 읽기는 교과서 위주로 하는 공부였다. 책읽기 맛을 느끼면서, 책을 가까이 한지 40년이 흘렀다. 그동안 손을 거처 간책도 꽤 많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생겼다가 없어졌던 것들이 있다. 그것은 기호, 즉 무엇인가 다르게 좋아지고 접하면 왠지 즐겁고 기쁜 것이다.
처음으로 내게 다가온 그런 손님은 ‘키에르케고르’라는 인물이다. 78년 여름방학 때 시골교회 허름한 책꽂이에서 안병욱 교수의 에세이집 10권짜리 한질을 읽다가 소개받았던 인물이다. 그 후 하나의 벽(癖)이 생기기 시작했다. ‘키에르케고르’의 책을 구해 읽는 것이다. 가난한 신학생이지만 그 당시 출간된 책을 될 수 있으면 구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기를 몇 년이 지난 두 번째 나에게 찾아온 손님은 ‘본회퍼’라는 인물이다. 그 당시 나온 책들을 구해 읽으면서 열심히 흠 취 하였다. 그렇게 신학교 시절을 마치고 목회를 나간 후,10년 만에 대학원공부를 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때 세 번째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 인물이 아니라, 그룹이다.
그들은 초기 기독교시대에 실존했던 3-4세기 사막교부들이다. 영성 가들이다. 그때부터 10여 년 동안 씨름을 하면서 그들의 이야기, 또는 그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왠지 좋았고, 구해서 읽고 싶고, 그런 책을 처다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해하였다. 그러다가 지금부터 몇 년 전 찾아온 손님은 조선시대 선비들이다.
이런 과정을 보면서 이것이 바로 벽(癖)이라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물론 나의 벽이란 깊이가 있지 못하다. 그러나 생각하면 좋고, 책방에 가서도 자꾸만 그 코너로 발길이 간다. 그러는 사이 사랑하게 되고 나에게 즐거움을 안겨주게 된다. 그러니 계속해서 관찰하고 더욱 빠져 들어가게 된다.
이런 벽(癖)에 대한 이야기는 조선시대 18세기 지식인들에게 왕성하게 있었다. 벽(癖)이란? ‘무엇인가를 지나치게 좋아해 미친 듯이 탐닉하는 것’을 말한다. 벽이란 말은 또한 치(痴)라는 말과 함께 보통은 사용한다. 치(痴)란? ‘너무 미련하고 우둔해서 미친 듯 한 짓을 하는 일’이다. 그런데 조선시대 18세기의 지식인의 벽(癖)은 남들이 못하는 그만의 독창적인 무엇을 소유하고 있을 때 사용하였다. 그런 사람 중 하나에 대한 글을 보자. “벽(癖)이 없는 사람은 아무런 쓸모없는 사람이다. 대개 벽이라는 글자는 ‘병 질(疾)’자와 ‘치우칠 벽(辟)’자를 따라 만들어졌다. 병 가운데 무엇인가 지나치게 치우친 것을 벽이라고 한다. 그러나 독창적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터득하는 정신을 갖추고 전문적인 기예를 습득하는 일은 오직 벽이 있는 사람만 가능하다. 김 군이 마침내 화원을 만들었다. 꽃을 바라보며 하루 종일 눈 한번 꿈쩍하지 않는다. 꽃 아래에 자리를 깔고 누워 꼼짝도 하지 않는다. 손님이 와도 말 한마디 나누지 않는다. 이러한 모습을 본 사람들은 반드시 미친놈이거나 멍청한 놈이라고 생각해 손가락질하며 비웃고 조롱하며 욕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김 군을 비웃고 조롱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런 생각은 이미 사라지고 만다. -중략- 김 군의 기예는 천고의 옛 사람과 비교해도 탁월하다. 김 군이 그린 백화보(百花譜)는 꽃의 역사에 길이 남을 공훈으로 기록할만 하고” . 이 글은 『북학의(北學議)』 저자 박제가가 쓴 백화보서(百花譜序)이다. 화가 김덕형 에게 써준 글이다. (『이덕무를 읽다』인용)
이처럼 18세기 조선의 지식인들은 여러 분야에서 벽치가 많았다. 유득공은 집비둘기를 직접 기르면서 사육과 모든 정보를 정리한 책 『발합경』을 썼고, 이서구는 앵무새를 기르면서 자신의 경험과 각종 자료 문헌을 수집해 책 『녹앵무경』을 썼다. 유명한 화가 허련(許鍊)의 호(號)는 소치(小痴)이다. 이덕무의 『간서치전(看書痴傳)』(책만 읽는 바보) 일부를 보자. “목멱산(木覓山 남산의 별칭) 아래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살았는데, 어눌(語訥)하여 말을 잘하지 못하였으며, 성격이 졸렬하고 게을러 시무(時務)를 알지 못하고, 바둑이나 장기는 더욱 알지 못하였다. 남들이 욕을 하여도 변명하지 않고, 칭찬을 하여도 자긍(自矜)하지 않고 오직 책보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아 추위나 더위나 배고픔을 전연 알지 못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21세가 되기까지 일찍이 하루도 고서(古書)를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그의 방은 매우 적었다. 그러나 동창ㆍ남창ㆍ서창이 있어 동쪽 서쪽으로 해를 따라 밝은 데에서 책을 보았다. 보지 못한 책을 보면 문득 기뻐서 웃으니, 집안사람들은 그의 웃음을 보면 기이한 책(奇書)을 구한 것을 알았다.” (『청장관전서』제4권 인용)
어느새 세월이 흘러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이제 남은 생애 여러 가지 할 것 있겠지만 후세 사람에게 그래도 한평생 살면서 치열하게 살았고, 그것 때문에 ‘즐겁고 행복 했어’ 라는 결과물 하나는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벽(癖) 또는 치(痴)가 아닐까? 예수와 함께 벽(癖) 하나 정도는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처음으로 내게 다가온 그런 손님은 ‘키에르케고르’라는 인물이다. 78년 여름방학 때 시골교회 허름한 책꽂이에서 안병욱 교수의 에세이집 10권짜리 한질을 읽다가 소개받았던 인물이다. 그 후 하나의 벽(癖)이 생기기 시작했다. ‘키에르케고르’의 책을 구해 읽는 것이다. 가난한 신학생이지만 그 당시 출간된 책을 될 수 있으면 구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기를 몇 년이 지난 두 번째 나에게 찾아온 손님은 ‘본회퍼’라는 인물이다. 그 당시 나온 책들을 구해 읽으면서 열심히 흠 취 하였다. 그렇게 신학교 시절을 마치고 목회를 나간 후,10년 만에 대학원공부를 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때 세 번째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 인물이 아니라, 그룹이다.
그들은 초기 기독교시대에 실존했던 3-4세기 사막교부들이다. 영성 가들이다. 그때부터 10여 년 동안 씨름을 하면서 그들의 이야기, 또는 그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왠지 좋았고, 구해서 읽고 싶고, 그런 책을 처다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해하였다. 그러다가 지금부터 몇 년 전 찾아온 손님은 조선시대 선비들이다.
이런 과정을 보면서 이것이 바로 벽(癖)이라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물론 나의 벽이란 깊이가 있지 못하다. 그러나 생각하면 좋고, 책방에 가서도 자꾸만 그 코너로 발길이 간다. 그러는 사이 사랑하게 되고 나에게 즐거움을 안겨주게 된다. 그러니 계속해서 관찰하고 더욱 빠져 들어가게 된다.
이런 벽(癖)에 대한 이야기는 조선시대 18세기 지식인들에게 왕성하게 있었다. 벽(癖)이란? ‘무엇인가를 지나치게 좋아해 미친 듯이 탐닉하는 것’을 말한다. 벽이란 말은 또한 치(痴)라는 말과 함께 보통은 사용한다. 치(痴)란? ‘너무 미련하고 우둔해서 미친 듯 한 짓을 하는 일’이다. 그런데 조선시대 18세기의 지식인의 벽(癖)은 남들이 못하는 그만의 독창적인 무엇을 소유하고 있을 때 사용하였다. 그런 사람 중 하나에 대한 글을 보자. “벽(癖)이 없는 사람은 아무런 쓸모없는 사람이다. 대개 벽이라는 글자는 ‘병 질(疾)’자와 ‘치우칠 벽(辟)’자를 따라 만들어졌다. 병 가운데 무엇인가 지나치게 치우친 것을 벽이라고 한다. 그러나 독창적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터득하는 정신을 갖추고 전문적인 기예를 습득하는 일은 오직 벽이 있는 사람만 가능하다. 김 군이 마침내 화원을 만들었다. 꽃을 바라보며 하루 종일 눈 한번 꿈쩍하지 않는다. 꽃 아래에 자리를 깔고 누워 꼼짝도 하지 않는다. 손님이 와도 말 한마디 나누지 않는다. 이러한 모습을 본 사람들은 반드시 미친놈이거나 멍청한 놈이라고 생각해 손가락질하며 비웃고 조롱하며 욕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김 군을 비웃고 조롱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런 생각은 이미 사라지고 만다. -중략- 김 군의 기예는 천고의 옛 사람과 비교해도 탁월하다. 김 군이 그린 백화보(百花譜)는 꽃의 역사에 길이 남을 공훈으로 기록할만 하고” . 이 글은 『북학의(北學議)』 저자 박제가가 쓴 백화보서(百花譜序)이다. 화가 김덕형 에게 써준 글이다. (『이덕무를 읽다』인용)
이처럼 18세기 조선의 지식인들은 여러 분야에서 벽치가 많았다. 유득공은 집비둘기를 직접 기르면서 사육과 모든 정보를 정리한 책 『발합경』을 썼고, 이서구는 앵무새를 기르면서 자신의 경험과 각종 자료 문헌을 수집해 책 『녹앵무경』을 썼다. 유명한 화가 허련(許鍊)의 호(號)는 소치(小痴)이다. 이덕무의 『간서치전(看書痴傳)』(책만 읽는 바보) 일부를 보자. “목멱산(木覓山 남산의 별칭) 아래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살았는데, 어눌(語訥)하여 말을 잘하지 못하였으며, 성격이 졸렬하고 게을러 시무(時務)를 알지 못하고, 바둑이나 장기는 더욱 알지 못하였다. 남들이 욕을 하여도 변명하지 않고, 칭찬을 하여도 자긍(自矜)하지 않고 오직 책보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아 추위나 더위나 배고픔을 전연 알지 못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21세가 되기까지 일찍이 하루도 고서(古書)를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그의 방은 매우 적었다. 그러나 동창ㆍ남창ㆍ서창이 있어 동쪽 서쪽으로 해를 따라 밝은 데에서 책을 보았다. 보지 못한 책을 보면 문득 기뻐서 웃으니, 집안사람들은 그의 웃음을 보면 기이한 책(奇書)을 구한 것을 알았다.” (『청장관전서』제4권 인용)
어느새 세월이 흘러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이제 남은 생애 여러 가지 할 것 있겠지만 후세 사람에게 그래도 한평생 살면서 치열하게 살았고, 그것 때문에 ‘즐겁고 행복 했어’ 라는 결과물 하나는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벽(癖) 또는 치(痴)가 아닐까? 예수와 함께 벽(癖) 하나 정도는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