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글쓰기의 대가인 연암 박지원의 소소한이야기들을 볼 수 있는 그의 전기를 읽었다. 그런데 그 책을 쓴 사람은 연암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이다. 그것이 『나의 아버지 박지원』이다. 보통은 그 사람이 죽으면 조선시대는 그를 잘 아는 사람이 행장, 또는 묘지명을 써서 문집에 남긴다. 그러면 후세의 사람들이 그 사람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그래서 자기 스스로 묘지명을 쓰는 경우도 있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다산 정약용의 ‘자찬 묘지명’이다. 그런데 연암은 죽자 그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인 연암의 처남인 이재성(李在誠, 1751~1809) 마저 얼마 후 죽으니 누구에게 행장을 부탁할 수 없는 처지라, 아들이 기억을 더듬어 아버지의 일생을 글로 남긴다. 그런 아들이 참 부럽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연암 박지원에 대해서 여러 가지 감동스런 이야기들을 알고 있는 것이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을 읽으면서 밑줄치고 다른 종이에 본문을 옮겨 쓴 것들이 여럿 있다. 그 중에 몇 개를 여기에 옮겨본다.
“아버지께서 고을 원에 부임하실 때와 그만두고 돌아오실 때 지녔던 물건이란 책5, 6 백 권 및 붓, 벼루, 향로, 다기(茶器)등이었다. 그래서 짐이라곤 고작 4,5바리(말 한 마리의 등에 실은 짐을 한 바리라 한다.)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임지에 도착하시면 꼭 목공부터 먼저 불러 서가와 책상 따위를 만들게 하셨다. 그리하여 가지고 온 책과 벼루 등을 가지런히 정리해두고 완상하셨다.”
“이때 임금(정조)께서 각신(규장각의 관원) 아무개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다. ‘박지원은 평생 조그만 집 한 채도 없이 궁벽한 시골과 강가를 떠돌며 가난하게 살았다. 이제 늘그막에 고을 수령으로 나갔으니 땅이나 집을 구하는 데 급급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듣자하니 정자를 짓고 연못을 파서 천리 밖에 있는 술친구와 글 친구를 초대하고 있다니, 문인의 행실이 이처럼 속되지 않기도 참 어려운 일이다. 또 들으니 고을 원으로서의 치적 또한 퍽 훌륭하다는 구나”
연암 박지원은 남들이 눈에 불을 키고 과거시험 보아 출세하려는 때에 과거시험에 연연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그는 50세 까지 가난하게 살다가 친구의 간청으로 늘그막에 내직을 거처 외직으로 안의현 원님 발령을 받아 5년간 임기를 채웠다. 위 이야기는 그때 일이다. 어떻게 고을 원님이 되어 부임할 때와 부임이 끝날 때가 같을 수 있는가? 한없이 그가 다시금 존귀하게 보여 지는 대목이다.
사실 연암은 안의현 원님으로 있을 때 아전들이 포탈한 곡식을 본래대로 채워 창고에 곡식이 10만 휘가 되었다. 이것은 당시 3,4만 냥을 챙길 만큼 큰 것이었다. 그런데 연암은 감사에게 요청해 곡식을 다른 고을로 옮겨버렸다. 누가 물었다. ‘그 돈은 자기 것으로 해도 이롭지 않은 돈이 아니건만 왜 굳이 마다하셨소?’ 연암은 말한다.‘나는 다만 연암 골의 가난한 선비에 불과하오. 하루아침에 만금을 횡재해서 부자가 되는 일이 나의 본분에 맞는 일이겠소?’
요즘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를 하면서 두 주택 보유자가 구설에 오른다. 연암 박지원의 삶의 단면을 보면서 연암과 같은 인물이 나라의 공직을 맡아야 하는데 하는 생각을 하였다. 연암 박지원 과 같은 청렴하고 충직한 공복이 많아야 건강한 사회가 된다. 또한 연암 박지원의 이야기는 종교인 나를 한번 다시 뒤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요즘 구설수에 많이 오르내리는 것 중 하나는 종교인, 종교지도자들의 물질과 성문제 일탈이다. 어느 고전전문가는 ‘연암은 가난을 기꺼이 택했다. 가난하되 구차하지 않은 삶!’이라 평했다. 힘들고 어려워도 구차하지 않는 삶을 살수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