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도, 마을에도, 무덤에도…지구 반바퀴 돌고도 남아
바람과 돌과 여자가 많아 삼다도로 불린 제주도. 거칠고 투박한 현무암 돌담은 섬 어딜 가나 쉽게 만날 수 있는 제주만의 풍경이다.

농부가 일하는 밭에서도, 가옥이 옹기종기 모인 마을에서도, 마소가 풀을 뜯는 목장에서도, 해녀가 물질하는 바닷가에서도 어김없이 돌담을 마주하게 된다.

돌담은 사시사철 바뀌는 제주의 풍경을 더욱 아름답게 완성한다.

제주의 유채꽃밭과 푸르른 청보리밭, 새하얗게 꽃을 피운 감자밭이 육지에서보다 더 찬란한 빛깔을 뽐내는 것은 검고 투박한 돌담과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삐죽빼죽 모난 돌을 얼기설기 쌓아 올린 돌담은 섬 전역을 돌며 굽이쳐 흐른다.

사람의 노동이 가미된 인공물이지만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살아온 선조들의 지혜가 그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흑룡만리' 제주 밭담
제주의 돌담은 화산섬의 척박한 환경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제주의 산과 들은 물론, 바닷속까지 어딜 파도 돌밭이다.

조금만 흙을 걷어내면 커다란 바위로 뒤덮여 있다.

수만 년 동안 섬 곳곳에서 분출한 용암이 굳으면서 형성된 빌레(넓적하게 펼쳐진 암반을 이르는 제주 방언)가 섬 전역을 덮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척박한 땅을 삶의 터전으로 일구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돌담이 탄생했다.

농작물을 경작하기 위해 땅을 덮고 있던 바위를 조각조각 캐냈고, 그걸 버릴 곳이 없으니 주위에 쌓았다.

이렇게 밭을 일구면서 쌓은 것이 바로 '밭담'이다.

밭담은 거센 바람과 마소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해줬다.

수천 년간 제주 전역에 쌓이고 쌓인 밭담의 길이는 총 2만2천108㎞. 지구 둘레가 대략 4만㎞이니 지구 반 바퀴를 돌고도 남는 길이다.

그래서 밭담을 '흑룡만리'(黑龍萬里)라 부르기도 한다.

검은 현무암의 밭담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구불구불 흘러가는 모습이 흑룡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밭담은 대부분 돌을 한 겹으로 쌓은 외담(홑담)이다.

반듯한 직선으로 쭉 뻗어있지 않고 구불구불하게 휘어진 모양을 한 것은 깊숙이 박혀 떼어내지 못한 빌레를 비켜 가며 쌓았기 때문이다.

빌레에서 떼어낸 크고 작은 돌들을 서로 이가 맞도록 엇갈리게 쌓는 데에는 오랜 경험이 필요하다.

각진 돌을 대부분 다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쌓아 올려 돌과 돌 사이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그래서 얼핏 보기에는 밀면 무너질 듯 아슬아슬해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거센 태풍에도 밭담이 버틸 수 있었던 비밀이 바로 이 구멍 속에 있다.

돌과 돌 사이 틈새를 통과하는 바람에 의해 압력 차가 생기면서 힘이 밭담 틈새 방향으로 작용해 돌들이 서로를 잡아당기면서 담이 더욱 견고해지는 것이다.

최근에는 제주에서도 시멘트로 구멍을 메운 조경용 돌담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렇게 빈틈없이 막은 돌담이 오히려 태풍이나 폭우에 더 쉽게 무너진다고 한다.

김유정 제주문화연구소장은 "바람을 온몸으로 막아내는 대신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바람을 어르고 달래는 것"이라며 "허술해 보이는 구멍 속에 선조의 지혜가 녹아 있다"고 말했다.

◇ 구좌읍 밭담길 따라 자박자박
제주도 안에서도 밭담의 원형이 잘 보존된 지역은 북동쪽이다.

구좌읍 김녕리, 하도리, 월정리, 행원리, 한동리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지역에는 곳곳에 밭담길이 조성되어 있다.

월정리에는 밭담테마공원도 있다.

봄기운이 완연해진 3월 초, 구좌읍 김녕리와 하도리로 밭담길 산책을 나섰다.

검은 물결처럼 굽이쳐 흐르는 담은 높아졌다가 다시 낮아지기를 반복한다.

삐죽빼죽 모난 돌들은 어느 하나 같은 모양 없이 제각각이다.

검은 담돌 곳곳에 누렇게 핀 돌꽃에서 모진 바람을 버텨 온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담 너머 보이는 밭의 모습도 각양각색이다.

푸릇푸릇한 마늘밭과 쪽파밭, 노란 물결이 일렁이는 유채꽃밭, 당근 캐는 손길로 분주한 밭, 이미 수확을 마치고 검붉은 흙을 드러낸 밭, 빌레 사이에 조성된 조그만 돌랭이 밭…
첩첩이 이어진 밭담 너머로 에메랄드빛 바다가 펼쳐지기도 한다.

가장 제주다운 풍경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밭담을 따라 한참 걷다 보니 밭 한가운데에 떡 하니 무덤이 놓여있다.

이 역시 제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독특한 풍경이다.

무덤 역시 돌담으로 둘려 있는데, 밭담과 달리 여러 겹으로 쌓은 사각 형태의 겹담이다.

이렇게 무덤 주위에 쌓은 돌담을 '산담'이라고 한다.

어쩌다 밭 안에 무덤이 자리하게 된 걸까?
제주에서도 옛날에는 주로 산야에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주위에 돌담을 쌓은 것은 목장의 마소나 들불에 의해 무덤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후 산야가 점점 밭으로 개간됐고, 산야에 있던 무덤들은 개간된 밭에 그대로 남게 됐다.

그러다 15세기 한라산을 중심으로 국영 목장이 확대되면서 아예 밭에다 무덤을 조성하는 풍습이 정착했다고 한다.

밭담과 밭담이 교차하는 지점에는 크고 작은 돌멩이를 넓게 쌓아 놓은 곳도 있다.

이를 잣벡이라고 한다.

경작하는 과정에서 계속 골라낸 돌을 쌓아 둔 일종의 자갈 저장소다.

이렇게 돌멩이를 쌓아뒀다가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이것으로 산담을 쌓았다.

또 잣벡을 길게 쌓아 안쪽 밭으로 이동하는 통로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 척박한 환경을 지탱해 온 버팀목
밭담을 언제부터 쌓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1234년(고려 고종 21년) 제주에 판관으로 부임한 김구가 이웃 간 분쟁을 막기 위해 경계를 표시하는 돌담을 쌓도록 했다는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해진다.

이는 제주 전역에 밭담이 확산하는 계기가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제주 사람들이 밭에만 돌담을 쌓았던 것은 아니다.

집 둘레에는 축담과 울담을 쌓았고, 올레길(집 입구에서 길까지 연결된 골목길)에는 올레담을 쌓았다.

바람이 불어오는 쪽은 높게 쌓아 바람을 막았고, 햇볕이 드는 쪽은 낮게 쌓아 볕이 잘 들어오게 했다.

목장에는 '잣성'과 '캣담'을 쌓아 방목한 말과 소들이 다른 지역 목장이나 농경지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했다.

통시(돗통, 돗통시)는 제주 전통 가옥에서 화장실 겸 돼지우리로 쓰기 위해 쌓은 돌담이다.

짚을 깔아 돼지 분뇨와 함께 섞어 삭힌 후 농사용 거름으로 사용했는데 이를 돗거름이라고 한다.

'성담'은 백성을 외적으로부터 보호하는 동시에 백성들이 성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역할을 했다.

바닷가에서도 돌담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물고기를 잡기 위해 쌓은 원담(갯담)이다.

바닷돌을 이용해 겹담 형식으로 낮게 담을 둘러 쌓고 밀물 때 들어온 물고기가 썰물 때 그 안에 갇히도록 했다.

해안가에 둥글게 쌓은 불턱은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고 바다로 들어갈 준비를 하던 곳이다.

가운데에 불을 피워 몸을 덥히기도 했다.

환해장성은 바다로 침입해오는 적을 막기 위해 해안선을 따라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쌓은 담이다.

태풍이 불 때 파도를 막는 역할도 했다.

현재 제주도 내 19개 해안마을에 환해장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돌담은 제주 사람들에게는 생활 그 자체였다.

밭에서도, 바다에서도, 마을에서도 다양한 모습으로 오랜 세월을 버티며 척박한 섬에서의 삶을 지탱해줬다.

서로 어깨를 맞대고 비바람을 버텨내는 돌담의 모습은 인내와 노력으로 함께 척박한 땅을 개척해 온 제주 사람들의 모습과도 닮은 듯하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1년 4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