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마다 다 서는 전철과는 급(?)이 달랐다. 정해진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동행한 산우 S는 아기를 안은 젊은 엄마가 입석인 걸 알고 얼른 자리를 양보한다. 그러고보니 원행도 아닌데 자리 차지하고 앉아 있는 나자신이 어쭙잖다. 주위를 살펴보다 객실 연결통로에 지팡이를 짚고 서 계신 노인을 발견했다. 여쭤 보았더니 입석이라 했다. 얼른 자리를 내어 드렸다. 고마움을 표하는 어르신과 젊은 엄마의 미소가 따스했다.
오후 1시 반을 넘어선 시각, 양평역을 빠져나와 해장국집을 찾았다. 어차피 비박이라 산행을 서두를 이유는 없다. 정상에 일반 산꾼들이 없어야 눈치없이 텐트를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느긋하게 ‘양평해장국’을 안주 삼아 가볍게 낮술까지 흡입한 후 택시를 세웠다.
“사나사(舍那寺)로 갑시다.”
콧수염을 기른 기사분,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도 그럴 것이, 네 명인데다가 비박 배낭이라 부피가 장난 아니었기 때문이다. 트렁크에 배낭 두개 넣으니 꽉 찼다. 두개는 뒷좌석 두 사람이 안고 탈 수밖에,, 그야말로 옴짝달싹할 수 없는 그림이다.
기사 양반, 한 술 더 뜬다. “만석에다 어마무시한 부피의 배낭까지 더하니 브레이크가 밀린다”고.
오른쪽에 사나계곡을 두고 송림이 숲을 이룬 고즈넉한 산길을 따라 택시가 힘겹게 오른다. 일주문을 지나 사나사(舍那寺) 앞마당에서 내렸다. 양평역에서 버스를 타면 옥천면 용천리 마을회관 앞에서 내려 이곳 절집까지 걸어 와야 하는데 오늘은 거저 먹은 셈이다.
사나사는 신라 경명왕7년(923)에 고승인 대경대사가 제자 용문과 함께 창건하고 5층 석탑과 노사나불상을 조성하여 봉안하고 절 이름을 사나사로 하였다. 순종 원년(1907)에는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들의 근거지라하여 사찰을 모두 불태워 없어졌고 2년뒤인 복구하였으며, 1950년 한국전쟁때 또다시 전소된 것을 1956년에 재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추색이 완연한 ‘사나사’다. 대웅전 팔작지붕의 용마루 선이 주위 산세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사나계곡의 물소리는 사바의 온갖 티를 씻겨 내릴 듯 청정하게 귓전을 울린다. 절 마당을 지나 가을 숲속으로 들어섰다.
그새 저버린 이파리들이 발바닥 아래서 바스락댄다. 겨우 매달린 빛바랜 이파리들은 살랑대는 바람에 자신의 명줄을 내맡긴 채 다시 올 봄을 고대하는 듯 하다. 숲속 갈림길의 팻말은 왼쪽으로 상원사와 장군봉을, 오른쪽으로 백운봉 방향을 가리킨다. 백운봉 방향으로 틀어 계곡을 가로지른다. 산길은 너덜지대로 이어지더니 조금씩 가팔라졌다. 배낭 무게가 어깨를 짓누른다. 그러나 기분좋은 무게감이다. 집문을 나설 때 친히(?) 배낭을 들어보던 옆지기께서 심드렁하게 한마디 툭 던졌다. “어휴~ 이걸 메고 산을 오른다고? 하기야 제 좋아 하는 일인데 바위인들 못 메고 가겠어” 산꾼들의 발길이 뜸한데도 등로는 뚜렷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 붙던 물소리가 잦아들 즈음, 주능선에 닿았다. 왼쪽으로 장군봉과 용문산 능선길이, 백운봉은 오른쪽 방향이다. 능선갈림길에 멈춰 서서 잠시 가쁜 숨을 가라앉히고 땀을 식혔다.
까칠하게 솟구친 봉우리일수록 정상 조망에 인색하지 않다. 특히나 느지막한 오후라 몽환적 일몰이 잔뜩 기대가 된다. 숲길을 벗어나자 철계단이 막아선다. 이 구간을 올라서면 정상이다. 철난간을 당겨 잡으며 사력을 다한다.
근래들어 오른쪽 무릎이 시큰거려 평소 하지 않던 무릎보호대까지 했다. 마음은 청춘인데 현실은 도가니를 조심히 다뤄야 할 나이인게다. 난간에 기대어 용문산을 건너다 본다. 용문산에 올려진 군시설물은 마치 대침을 꽂아 산기운을 찍어누르는 형상이다. 이렇듯 산꼭대기 철구조물은 자연 경관의 훼방꾼이다. ~한발 두발 걸어서 올라라~
배낭이 어깨를 짓눌러도, 도가니가 연신 시큰거려도, 기어이 꼭대기에 올랐다. 해거름에 만난 백운봉(940m)은 또다른 매력이다. 지는 해가 남한강에 자맥질을 하며 황금빛으로 눈부시게 부서진다. 산야의 가을색은 노을빛과 어우러져 멋진 하모니를 선사한다.
산 아래서 본 뾰족한 정상부는 울퉁불퉁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워낙 공간이 비좁아 벼랑에 기둥을 박아 3개의 사각 전망데크를 설치해 놓아 산객들이 운신할 수 있게 해놓았다. 데크는 2인용 텐트 하나 올려 놓을 수 있는 크기다.
백두산 천지에서 옮겨온 흙과 돌을 올려놓은 ‘통일암’비석도 정상 한 켠을 우두커니 지키고 서 있다.
비문에는 “위 흙과 岩을 6천만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백두산 천지에서 옮겨 이곳 백운봉에 세우다.”라고 쓰여져 있다. 북쪽으로 용문산의 위용에, 동남쪽으로 추읍산의 공손함에, 남한강 너머로 양자산의 아늑함에, 발아래로 남한강의 유장한 흐름에, 한참동안 넋을 놓고 말았으니… 등줄기가 서늘하다. 식은 땀이 금새 한기를 느끼게 한다. 정상부의 기온은 산 아래와 또 다르다. 배낭을 열어 비니와 방한재킷을 꺼내 입고서 3개의 데크 중 한 곳에 짐을 모아 놓고 텐트 두 동을 설치했다. 산골짝의 어둠은 짙지만 산정의 어둠은 옅다. 양평 도심의 야경과 달빛에 드러난 주변 산군들의 실루엣 그리고 텐트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의 앙상블에 목축임(?)까지 더해지니 더할나위 없는 ‘소확행’이다.
일행 넷이 둘러 앉아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을 때, 머리 위로 한 뼘이나 더 높은 배낭을 메고 홀로 비박에 나선 산꾼이 가쁜 숨을 토하며 나타났다. 마침 데크가 하나 비어 있어 다행이다. 그리고 30여분이 지났을까, 또 나홀로 비박꾼이 올라왔다. 그는 더 이상 빈 공간이 없음을 확인하고 북쪽 철계단 아래쪽에서 공간을 찾아보겠다며 사라졌다.
그렇게 뾰족봉에 올라앉은 다섯 산꾼은 이마를 맞대고서 세상사를 안주삼아 권커니 자커니하며 깊어가는 가을밤을 탐했다.
다행이도 바람이 없어 춥지는 않았다. 하기야 방한셔츠에 바람막이 덧옷까지 입고 오리털 침낭 속에 들었는데, 춥다면 엄살이다. 새벽 어스름이 걷히면서 동쪽 마루금을 따라 붉은 기운이 비치기 시작했다. 텐트에서 나와 전망데크 난간에 기대어 일출을 기다렸다. 양평 도심은 하얗게 피어오른 새벽 물안개 속에 갇혀 있다. 일출을 보기위해 지리산 천왕봉에도, 설악산 대청봉에도 여러번 올랐건만 단 한번 온전한 일출 광경을 보지 못했다. 덕을 쌓지 못한 탓이라며 여겼는데 오늘만큼은 그게 아니다. 치악산 능선 저너머에서 붉은 기운이 부채살처럼 번지더니 순간, 불덩이가 이글거리며 솟구쳤다. 한참을 넋을 놓고 바라 보았다. 어제 일몰에 이어 오늘 일출까지, 백운봉은 내게 환희와 감동을 선물해 주었다.
08시 20분, 첫 산꾼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 발빠르고 부지런한 산꾼들이 하나둘 정상에 올랐다. 좀 더 느긋하게 산정의 아침을 즐기고 싶었지만 자리를 비우는 게 맞다. 텐트를 접고 배낭을 꾸린 후 달달한 믹스 커피 한잔으로 데크 목의자에 걸터앉아 한껏 여유를 가져 본다. 좀 더 머물고 싶을 때 내려서는 것이 진리다. 인생이 그러하듯 말이다. 한 줌 아쉬움을 산봉에 내려놓고 날머리로 정한 새수골 방면으로 내려선다.
가파른 목계단을 몇발짝 내려서면 암벽을 따라 지그재그로 놓인 철계단이 바톤을 잇는다. 발끝에 힘을 주며 철계단을 조심스레 내려서서 뒤돌아 백운봉을 올려다 보았다. 파스텔톤 가을빛이 산자락을 뒤덮고 있다. 30분 가량 산길을 따라 내려서면 ‘백년 약수터’가 나온다. 비를 피할 수 있는 정자와 나무벤치가 있는 쉼터다. 바위틈 사이로 아주 조금씩 샘물이 새어 나온다. 차를 끓이는 최고의 물이라는 석간수다. 생각때문일까, 물맛도 깔끔하다. 백년약수터를 벗어나 고즈넉한 숲길로 들어서자, 핏빛단풍이 발목을 잡는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마력을 지닌 빛깔이다. 다가서면 금방이라도 재킷에 핏빛이 묻어날 것만 같다. 정오 무렵, 날머리인 용문산자연휴양림에 닿았다. 매력 만점, 가을 백운봉 비박 산행은 이렇게 마무리했다. 비박 초짜에게 선뜻 ‘가을’을 내어준 산우(서**, 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