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나뭇잎이 어찌 견딜까, 박윤식

<사진 제공 : 박윤식님>


나뭇잎이 어찌 견딜까



박윤식



푸른 청춘 탕진하고


쇠약해진 핼쑥한 몸


찬바람에 흔들리고 있는데


짓궂은 눈송이 덮어 누르네



[태헌의 한역]


樹葉何以耐(수엽하이내)



蕩盡靑春色(탕진청춘색)


衰殘身已瘠(쇠잔신이척)


寒風往往搖(한풍왕왕요)


新雪還蒙抑(신설환몽억)



[주석]


* 樹葉(수엽) : 나뭇잎. / 何以(하이) : 어떻게, 어찌. / 耐(내) : 견디다.


蕩盡(탕진) : 탕진하다, 다 쓰다. / 靑春色(청춘색) : 청춘의 빛. 여기서는 푸른빛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衰殘(쇠잔) : 쇠잔하다, 쇠약하다. / 身已瘠(신이척) : 몸이 이미 수척하다, 몸이 이미 여위다.


寒風(한풍) : 찬바람. / 往往(왕왕) : 왕왕, 이따금.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搖(요) : 흔들다.


新雪(신설) : 새로 내린 눈, 첫눈. 원시의 ‘짓궂은 눈송이’를 고쳐 번역한 것이다. 글쓴이가 이 글을 쓰던 날 내린 눈이 첫눈이었다. / 還(환) : 다시, 또.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蒙抑(몽억) : 덮어 누르다.



[한역의 직역]


나뭇잎이 어찌 견딜까



청춘의 빛 탕진하고


쇠약해져 몸은 이미 핼쑥!


찬바람이 이따금 흔드는데


새 눈이 또 덮어 누르누나



[한역 노트]


일요일인 12월 13일에 서울과 경기 일원에 첫눈다운 첫눈이 내렸다. 제법 쌓이기도 했던 탓에 이날 SNS에는 눈과 관계되는 시와 글이 무척 많이 올라왔다. 몸이 쉬는 날이라 마음도 쉬면서 이것저것 뒤적여보다가 역자는 위의 시를 사진과 함께 마주하게 되었다. 보는 순간 한시로 만들면 되겠다는 생각이 퍼뜩 스쳤지만, 디카시는 앞서 이미 두어 번 다루었기에 다소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오늘 칼럼으로 선보이게 된 것은 이즈음이 아니면 나무에 달려 있는 나뭇잎을 보기가 사실상 쉽지 않을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겨울이 점점 깊이를 더해 가면 앞으로 한동안은 바람도 세차게 불고 눈도 많이 내려, 나무에 달린 나뭇잎은 구경조차 쉽지 않을 게 분명하다.


봄철부터 여러 달을 나무에 매달려 한껏 푸르던 나뭇잎은 가을 어느 시점에 찬란하게 물들었다가 서서히 빛이 바래어간다. 대개의 나뭇잎은 땅에 떨어진 후에 빛이 바래지만 얼마간의 나뭇잎은 나무에 매달린 채로 빛이 바래기도 한다. 첫눈이 내린 날 산책길에서 보게 된 나무에 달린 나뭇잎이 빛바래 푸르름을 잃은 것을 두고, 글쓴이는 시적 감수성을 끌어올려 푸른 청춘을 탕진한 것이라고 하였다. 자연계의 일을 사람의 일에 견준 이러한 비유는 그 아래에서도 이어져, 나뭇잎이 탈색되고 비쩍 마른 것을 쇠약해져 핼쑥한 몸으로 묘사하였다. 나뭇잎이 그런 모습으로 초겨울 찬바람에 애잔하게 시달리다가 언제 생을 마감하게 될 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급기야 눈까지 내려 육신을 덮어 짓누르니 그 괴로움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이런 연유 때문에 이 시의 제목이 “나뭇잎이 어찌 견딜까”가 되었을 것이다.


역자가 만일 이 시를 소재로 하여 학생들에게 시험 문제를 냈다면, “이 시를 보면 연상되거나 이 시와 연관이 있는 사자성어(四字成語)를 아는 대로 적으시오.”라고 했을 듯하다. 역자가 잠깐 동안 정답으로 생각해본 사자성어만 해도 대여섯 개나 되니 독자들께서도 한번 문제를 풀어보기 바란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사자성어와 고사성어(故事成語)는 그 뜻이 많이 다르다.


이 시는 질병이나 생활고 등으로 고단한 삶을 사는 어느 나이 든 사람에 대한 비유로 볼 수는 있어도, 코로나 시대를 힘겹게 지나가고 있는 우리에 대한 비유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를 마른 채 나무에 매달린 나뭇잎에 견준다는 것이 그다지 적절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눈을 이고 있는 나뭇잎은 고단해 보이는 그 처지와는 관계없이, 겨울이 오기 전에 진작 떨어졌어야 했을 잎이기에 현재 덤인 삶을 사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은 결코 덤이 아니다. 어느 시인이 홀가분한 삶을 꿈꾸며 “태어나자마자 여생”이라고 했다 해서 우리의 삶이 진짜로 여생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저 초겨울 나뭇잎에 견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초겨울 나뭇잎이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거나 바람의 채찍질에 시달려 떨어지게 되더라도 우리가 이 때문에 슬퍼할 까닭이 없는 것은, 다른 나뭇잎처럼 뿌리로 돌아갔다가 언젠가 다시 새싹의 하나가 되어 우리 곁으로 돌아올 것임을 아는 때문이다. 그러한 대자연의 섭리를 머리맡에 두고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가 슬퍼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역자는 4행으로 된 원시를 오언절구(五言絶句)로 재구성하였다. 이 한역시의 압운자는 ‘色(색)’·‘瘠(척)’·‘抑(억)’이다.


2020. 12. 15.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hansh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