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장마, 조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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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김이조님>
장마
조영수
하느님도
우리 엄마처럼
건망증이 심한가 보다
지구를 청소하다가
수도꼭지 잠그는 걸
잊어버린 모양이다
콸콸콸콸,
밭에 물이 차서
수박이 비치볼처럼 떠오르고
꼬꼬닭도 알을 두고
지붕 위에서 달달 떨고
새로 산 내 노란 우산도
살이 2개나 부러졌는데
아직도 콸콸콸콸
하느님, 수도꼭지 좀 잠궈 주세요
[태헌의 한역]
霖雨(임우)
上帝亦復有健忘(상제역부유건망)
恐與吾母可比儔(공여오모가비주)
夏日掃除地球時(하일소제지구시)
渾忘關閉水龍頭(혼망관폐수룡두)
活活活活(괄괄괄괄)
活活活活(괄괄괄괄)
田浸西瓜如球泛(전침서과여구범)
家鷄遺卵屋上啾(가계유란옥상추)
吾人新得黃雨傘(오인신득황우산)
傘骨數折心已憂(산골수절심이우)
活活活活(괄괄괄괄)
活活活活(괄괄괄괄)
嗚呼皇天上帝邪(오호황천상제야)
千萬關閉水龍頭(천만관폐수룡두)
[주석]
* 霖雨(임우) : 장마, 장맛비.
上帝(상제) : 하느님. / 亦復(역부) 또한, 역시. / 有(유) : ~이 있다. / 健忘(건망) : 건망증.
恐(공) : 아마도, 어쩌면. / 與吾母(여오모) : 우리 엄마와 더불어. / 可比儔(가비주) : 짝[우열]을 겨룰 만하다.
夏日(하일) : 여름날. 한역(漢譯)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는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掃除(소제) : ~을 청소하다. / 地球(지구) : 지구. / 時(시) : ~할 때
渾忘(혼망) : ~을 까맣게 잊다. / 關閉(관폐) : ~을 닫다, ~을 잠그다. / 水龍頭(수룡두) : 수도꼭지.
活活活活(괄괄괄괄) : 물이 세차게 흐르는 소리. 콸콸콸콸.
田浸(전침) : 밭이 (물에) 잠기다. / 西瓜(서과) : 수박. / 如球泛(여구범) : 공처럼 뜨다.
家鷄(가계) : 집에서 기르는 닭, 닭. / 遺卵(유란) : 알을 (버려)두다. / 屋上(옥상) : 옥상, 지붕 위. / 啾(추) : 울다. 이 글자는 원문에 쓰인 ‘떨다[慄]’의 의미를 대신하여 역자가 임의로 바꾼 것이다.
吾人(오인) : 나. / 新得(신득) : 새로 ~을 얻다, 새로 ~을 마련하다. / 黃雨傘(황우산) : 노란 우산.
傘骨(산골) : 우산살. / 數折(수절) : 몇 개가 꺾이다, 몇 개가 부러지다. / 心已憂(심이우) : 마음이 이미 걱정스럽다.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는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嗚呼(오호) : 아아! 감탄사. 아래 ‘皇天’과 함께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는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皇天(황천) : ‘하늘’의 높임말. / 邪(야) : ~야, ~여. 호격(呼格) 조사이다.
千萬(천만) : 부디, 아무쪼록.
[한역의 직역]
장마
하느님 또한 건망증이 있으셔서
아마 우리 엄마와 겨룰 만한 듯
여름철에 지구를 청소할 적에
수도꼭지 잠그는 걸 잊으신 모양
콸콸콸콸
콸콸콸콸
밭이 잠겨 수박이 공처럼 뜨고
닭은 알을 두고 지붕 위에서 울고
내 새로 생긴 노란 우산은
우산살 몇 개 부러져 맘 걱정인데
콸콸콸콸
콸콸콸콸
아, 하늘에 계신 하느님!
부디 수도꼭지 잠궈 주세요
[한역 노트]
비는 무심하여도 씻을 것을 씻어내며 흐를 곳을 흐르다가 고여야 할 곳에 고일 줄을 안다. 그러나 그런 비도 너무 양이 많아 ‘큰물’이 되면 가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재앙을 몰고 온다. 이 때문에 생겨난 말이 “가뭄 끝은 있어도 물 난 끝은 없다.”, “삼 년 가뭄에는 살아도 석 달 장마에는 못 산다.”와 같은 옛 속담들이다. 사람들이 자연을 파괴하기 오래전부터 가뭄과 큰물은 있었지만, 자연 파괴가 일상화된 요즘처럼 잦거나 심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사람들이 저지른 업보 때문에 누군가가 치러야 하는 대가(代價)는 실로 엄청나다. 그런데 죄는 주로 자연을 거스르며 사는 가진 자들이 짓고, 벌은 주로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가난한 자들이 직접적으로 받는다는 데에 그 비애가 있다. 이즈음에 큰물로 고통을 겪는 모든 분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뜻을 전해드린다.
위의 시는 우리가 거의 해마다 만나게 되는 장마 이야기를 동화와 같은 기법으로 들려준 동시이다. 시인은 다소 엉뚱하게 절대자인 하느님에게 인성(人性)을 부여하여 “건망증이 심한가 보다”라고 하였다. 다음으로 하느님에게 인사(人事), 곧 사람의 일인 청소를 하게 함으로써 절대자와 그 피조물인 사람 사이에 있음직한 간극(間隙)의 벽을 허물었다. 물론 청소를 해도 절대자의 수준에 걸맞게 지구를 청소할 정도의 스케일은 당연히 고려하였다. 청소하려고 수도꼭지를 틀었다가 잠그는 것을 깜빡하는 일은 건망증이 있는 가정주부들이 종종 범하게 되는 실수인데, 하느님 또한 그러하여 그 결과로 홍수가 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재치 있는 비유인가!
물이 든 수박밭에 수박이 공처럼 떠오른 모습과 닭이 알을 두고 지붕 위에 올라 달달 떠는 광경은 장마로 인한 피해가 결코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는 기록 사진이다. 시 속의 주인공이 새로 산 노란 우산을 얘기하고 있으니 주인공은 아마도 어린이일 것이다. 이 어린이가 하느님이 수도꼭지를 깜빡한 것을 알릴 방법으로는 하느님을 부르며 기도하는 것밖에 없었으리라.
시인이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어도 우리는 이 시를 통해 하느님도 실수한다는 명제를 도출해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예정된 잘못’을 실수로 간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아가 나의 잘못 혹은 실수로 인해 고통 받는 자가 없게 하는 것, 그것이 이 시의 진정한 뜻이 아닐까 싶다.
연 구분 없이 15행으로 된 원시를 역자는 14구의 잡언체(雜言體:구마다 글자 수가 일정하지 않은 시)로 재구성하였다. 이 가운데 사언(四言) 4구는 동일한 의성어의 반복인데 달리 압운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구(詩句)의 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두 군데서 한 구씩 추가한 것이므로 굳이 압운과 연관시켜 설명하자면 매구(每句)마다 동자(同字)로 압운한 시련(詩聯)을 시 중간에 삽입한 형태라고 할 수 있겠다. 나머지 10구는 모두 칠언고체로 한역하였으며 짝수 구마다 압운하였는데, 그 압운자는 ‘儔(주)’·‘頭(두)’, ‘啾(추)’·‘憂(우)’, ‘頭(두)’이다.
2020. 8. 11.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hansh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