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의 문화유산 등재, 기쁨 앞서 걱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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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하면 으레 군 감방을 떠올린다.
혹 병자호란을 먼저 떠 올리는 이들도 있겠지만…
어릴 적, 시골집 이웃 삼촌의 단골 레파토리는 ‘군대’였다.
월남에 파병되어 베트콩 잡던 이야기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다.
다음으로 많이 들은 이야기는 ‘남한산성’ 경험담이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대강 이러하다.
말년 휴가 때 다이너마이트(폭약)를 몰래 갖고 나왔다.
물고기를 잡기 위해 연못에 그 폭약을 터트리기로 또래들과 작당,
연못가 바위 틈에 폭약을 넣어 심지에 불을 당겼다.
폭음과 함께 하얗게 물기둥이 솟구쳐 올랐고,
이어 물고기가 배를 뒤집은 채 수면 위로 떠올랐다.
쾌재는 잠깐,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했고, 꼼짝없이 헌병대로 인계됐다.
이후 군재판을 거쳐 ‘남한산성’ 신세가 되고 말았다는 썰이다.
한때 남한산성 외곽에 있던 육군교도소 때문에 ‘남한산성 간다’는 말은 곧
‘군 복무 중 사고를 쳐 감방 간다’란 말과 같았다.
그 교도소는 1985년 이후 다른 곳으로 옮겨가 ‘남한산성 간다’란 말도
이젠 기억 속 저 편으로 사라진지 오래다. “알 수 없는 것은 조선이다. 淸 군사가 송파강(잠실 부근 한강)을 건널 때
행군대열 앞에 조선 군대는 한 번도 얼씬하지 않았다.
누런 개들이 낯선 행군 대열을 향해 짖어댈 뿐이었다.
산성의 문을 닫아 걸고 내다보지 않으니 맞서겠다는 것인지,
돌아서겠다는 것인지…”
병자호란의 치욕을 에둘러 적은 소설 ‘남한산성’의 한 대목이다.
조선 인조는 10만의 청군이 공격해 오자, 천혜의 요새인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성 밖의 민초들이 청군에 유린되고 있는데도 성 안에선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남한산성에 갇힌 조선군은 막강 청군의 공격에 40여일이나 버텨냈지만
결국 성안의 식량이 바닥나자 청군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렇듯 군 감방의 시린 기억이 스며 있고, 굴욕의 역사가 숨쉬고 있는
‘남한산성’에 낭보가 날아 들었다.
지난 6월 22일,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이다.
칙칙하게 각인된 이미지를 털고 국난 극복의 거점으로서
남한산성의 가치를 되찾아야 한다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다.
기쁜 마음에 지난 주말,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지하철 5호선 마천역 1번 출구로 나와 10분 걸으면 들머리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축하 현수막 한 두개는 걸려 있을 법도 한데… 없다.
앗차! 남한산성 주변 상인들로서는 세계문화유산 지정이 달갑지 않을 수 있겠다.
문화유산의 관리와 보존을 빌미로 인접한 상점들에 대한
규제의 잣대가 한층 더 엄격해질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계곡을 따라 어지러이 들어선 먹을거리 골목을 빠져나와
곧장 산성의 서문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청군에 항복하러 삼전도로 향할 때 나섰던 우익문이
바로 서문이다. 산성의 정문인 자화문으로 나서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항복의 의미로 남색의 청군복으로 갈아입고 삼전도로 내려서는
인조의 비통함은 어떠하였을까?
민초들의 눈물이 배어 있는 그 길을 따라 오른다. 마천역에서 1시간 남짓 걸어, 서문에 닿았다. 잠시 잠실벌을 굽어본다.
청군이 짓밟고 지났을 당시의 송파강이 뇌리에 아른거린다.
서문을 통과해 산성 안으로 들어섰다.
성문 바로 앞 노상에선 아이스크림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성문 바로 옆 송림에선 술판이 즐펀하게 벌어지고 있다. 이렇게 쓰여져 있는데도, 이렇게 아랑곳 않고…
‘등재’ 前이나 後나 변한 건 없다.
막무가내 노점상도, 꼴불견 술판도 여전했다.
관리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건지, 관심이 없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성곽 안쪽 길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걸었다.
남한산성 전체 성곽 길이는 11.76㎞(내성 9.05㎞, 외성 2.71㎞)다.
내성을 따라 한바퀴는 도는 거리는 8km 남짓 된다. 앞으로 이곳을 찾아 올 세계인들이 부쩍 늘어날 것이기에
자연석을 이용한 방어적 축성술이 뛰어나다는 남한산성의
돌 하나, 풀 한포기까지 허투루 보이질 않는다. 성 외곽은 높디높으나 성곽 안은 몸을 가릴 만큼의 높이다.
끝간데없이 이어진 성곽에는 축성에 동원된 수많은 병사와 민초들의
피와 땀이 서려 있고 한(恨)도 응어리져 있을 것이다. 장경사 신지옹성을 지나 동문, 3개의 옹성, 남문으로 이어진 성곽길에서
문화유산 등재의 기쁨은 반감되고 걱정이 배가 되니… 성벽의 덮개는 금방이라도 떨어져 내릴듯 어긋나 있고,
회칠이 된 벽재는 떨어져나가 길바닥에 나뒹굴고,
담벽의 붉은 속살은 연신 부스러져 내린다.
오로지 등재만을 염두에 둔 전시성 행정 탓일까?
산성의 ‘부실 복원’ 목소리도 만만찮게 들린다.
보도에 따르면 무너진 채 방치된 제1남옹성 등은 문화유산 실사단에게
아예 보여 주지도 않았다는 게 인근 주민들의 주장이다. 성벽 보수를 위해 씌워놓은 파란 비닐막은 숫제 산성의 일부나 다름없다.
십수년 산성길을 걸을 때마다 위치만 옮겨 다닐 뿐 늘 봐온 모습이다.
이는 곧 임시방편식 보수만 거듭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다. 버젓이…부끄운 줄도
바닥에 흩어진 성벽 파편을 밟으며 남문을 지나 수어장대 방향으로 향했다.
무너져내리는 성벽에 올라앉아 셀카에 열중인 커플,
낮술에 취해 벤치에 길게 드러누운 사람,
“남한산성 세계유산 등재~ 노상식품을 이용하지 맙시다”라고 적힌
노랑 현수막을 비웃듯 코 앞에서 막걸리를 팔고 있는 노점상인…
하나같이 엉망이다. 남한산성 서문(우익문)
세계 문화유산에 걸맞는 체계적인 보존과 관리가 시급하다.
혹 병자호란을 먼저 떠 올리는 이들도 있겠지만…
어릴 적, 시골집 이웃 삼촌의 단골 레파토리는 ‘군대’였다.
월남에 파병되어 베트콩 잡던 이야기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다.
다음으로 많이 들은 이야기는 ‘남한산성’ 경험담이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대강 이러하다.
말년 휴가 때 다이너마이트(폭약)를 몰래 갖고 나왔다.
물고기를 잡기 위해 연못에 그 폭약을 터트리기로 또래들과 작당,
연못가 바위 틈에 폭약을 넣어 심지에 불을 당겼다.
폭음과 함께 하얗게 물기둥이 솟구쳐 올랐고,
이어 물고기가 배를 뒤집은 채 수면 위로 떠올랐다.
쾌재는 잠깐,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했고, 꼼짝없이 헌병대로 인계됐다.
이후 군재판을 거쳐 ‘남한산성’ 신세가 되고 말았다는 썰이다.
한때 남한산성 외곽에 있던 육군교도소 때문에 ‘남한산성 간다’는 말은 곧
‘군 복무 중 사고를 쳐 감방 간다’란 말과 같았다.
그 교도소는 1985년 이후 다른 곳으로 옮겨가 ‘남한산성 간다’란 말도
이젠 기억 속 저 편으로 사라진지 오래다. “알 수 없는 것은 조선이다. 淸 군사가 송파강(잠실 부근 한강)을 건널 때
행군대열 앞에 조선 군대는 한 번도 얼씬하지 않았다.
누런 개들이 낯선 행군 대열을 향해 짖어댈 뿐이었다.
산성의 문을 닫아 걸고 내다보지 않으니 맞서겠다는 것인지,
돌아서겠다는 것인지…”
병자호란의 치욕을 에둘러 적은 소설 ‘남한산성’의 한 대목이다.
조선 인조는 10만의 청군이 공격해 오자, 천혜의 요새인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성 밖의 민초들이 청군에 유린되고 있는데도 성 안에선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남한산성에 갇힌 조선군은 막강 청군의 공격에 40여일이나 버텨냈지만
결국 성안의 식량이 바닥나자 청군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렇듯 군 감방의 시린 기억이 스며 있고, 굴욕의 역사가 숨쉬고 있는
‘남한산성’에 낭보가 날아 들었다.
지난 6월 22일,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이다.
칙칙하게 각인된 이미지를 털고 국난 극복의 거점으로서
남한산성의 가치를 되찾아야 한다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다.
기쁜 마음에 지난 주말,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지하철 5호선 마천역 1번 출구로 나와 10분 걸으면 들머리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축하 현수막 한 두개는 걸려 있을 법도 한데… 없다.
앗차! 남한산성 주변 상인들로서는 세계문화유산 지정이 달갑지 않을 수 있겠다.
문화유산의 관리와 보존을 빌미로 인접한 상점들에 대한
규제의 잣대가 한층 더 엄격해질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계곡을 따라 어지러이 들어선 먹을거리 골목을 빠져나와
곧장 산성의 서문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청군에 항복하러 삼전도로 향할 때 나섰던 우익문이
바로 서문이다. 산성의 정문인 자화문으로 나서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항복의 의미로 남색의 청군복으로 갈아입고 삼전도로 내려서는
인조의 비통함은 어떠하였을까?
민초들의 눈물이 배어 있는 그 길을 따라 오른다. 마천역에서 1시간 남짓 걸어, 서문에 닿았다. 잠시 잠실벌을 굽어본다.
청군이 짓밟고 지났을 당시의 송파강이 뇌리에 아른거린다.
서문을 통과해 산성 안으로 들어섰다.
성문 바로 앞 노상에선 아이스크림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성문 바로 옆 송림에선 술판이 즐펀하게 벌어지고 있다. 이렇게 쓰여져 있는데도, 이렇게 아랑곳 않고…
‘등재’ 前이나 後나 변한 건 없다.
막무가내 노점상도, 꼴불견 술판도 여전했다.
관리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건지, 관심이 없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성곽 안쪽 길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걸었다.
남한산성 전체 성곽 길이는 11.76㎞(내성 9.05㎞, 외성 2.71㎞)다.
내성을 따라 한바퀴는 도는 거리는 8km 남짓 된다. 앞으로 이곳을 찾아 올 세계인들이 부쩍 늘어날 것이기에
자연석을 이용한 방어적 축성술이 뛰어나다는 남한산성의
돌 하나, 풀 한포기까지 허투루 보이질 않는다. 성 외곽은 높디높으나 성곽 안은 몸을 가릴 만큼의 높이다.
끝간데없이 이어진 성곽에는 축성에 동원된 수많은 병사와 민초들의
피와 땀이 서려 있고 한(恨)도 응어리져 있을 것이다. 장경사 신지옹성을 지나 동문, 3개의 옹성, 남문으로 이어진 성곽길에서
문화유산 등재의 기쁨은 반감되고 걱정이 배가 되니… 성벽의 덮개는 금방이라도 떨어져 내릴듯 어긋나 있고,
회칠이 된 벽재는 떨어져나가 길바닥에 나뒹굴고,
담벽의 붉은 속살은 연신 부스러져 내린다.
오로지 등재만을 염두에 둔 전시성 행정 탓일까?
산성의 ‘부실 복원’ 목소리도 만만찮게 들린다.
보도에 따르면 무너진 채 방치된 제1남옹성 등은 문화유산 실사단에게
아예 보여 주지도 않았다는 게 인근 주민들의 주장이다. 성벽 보수를 위해 씌워놓은 파란 비닐막은 숫제 산성의 일부나 다름없다.
십수년 산성길을 걸을 때마다 위치만 옮겨 다닐 뿐 늘 봐온 모습이다.
이는 곧 임시방편식 보수만 거듭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다. 버젓이…부끄운 줄도
바닥에 흩어진 성벽 파편을 밟으며 남문을 지나 수어장대 방향으로 향했다.
무너져내리는 성벽에 올라앉아 셀카에 열중인 커플,
낮술에 취해 벤치에 길게 드러누운 사람,
“남한산성 세계유산 등재~ 노상식품을 이용하지 맙시다”라고 적힌
노랑 현수막을 비웃듯 코 앞에서 막걸리를 팔고 있는 노점상인…
하나같이 엉망이다. 남한산성 서문(우익문)
세계 문화유산에 걸맞는 체계적인 보존과 관리가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