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전에 20년 만에 가졌던 고등학교 동창회에서 고뇌에(?) 가득찬 친구를 발견했다. 속으로 직장에서 짤려서 저러나 싶어서 고민을 물어보았더니, 그 친구의 말은 이러했다
“나는 진짜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대 치대를 갔다. 거기에서도 열심히 해서 장학생도 되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는데, 지난 10수년간 나는 매일 사람들의 입만 쳐다보며 살고 있어…. 장비도 계속 바꿔야 하고, 안 그러면 손님도 안오고, 돈도 안 모이고, 빛만 늘고있어 너무 힘들고 지겨워….” 공부는 잘했는데, 나이값도 못하는 친구를 바라보며, 적성을 생각하지 않고 남의 눈을 의식해서 살아온 삶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
공부 잘하면, 의대를 가고, 교대를 가고 경찰대학을 가야하는(?) 세상에서 왜 의대를 갔느냐는 물음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직장 생활을 25년 이상 하고, 50세 중반에 이르고 돌아보니, 그것이 얼마나 잘 못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다.
– 의사이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고, 의사로서의 삶에 만족하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수이기 때문에 폼나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교수 생활을 좋아해서 열심히 강의 준비하고, 학생들이 그런 나의 노력을 알아주고 고맙다고 하고, 나는 그런 말에 자극받아 더 열심히 하고, 이러면서 나의 삶이 행복해 지는 것이다.
– 가족과 부모도 중요하지만, 내 인생은 나의 것. 보여지는 삶이 아닌, 내가 만족하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
이 새대를 사는 한 사람으로, 직업이 가지는 의미가 변색된 것이 너무 아쉽다. 검사면 잘 난 사람이고 청소부이면 못 난 사람이 아니다. 비록 청소부이지만 자기 일에 자부심믈 가지면서 하는 사람은 너무 멋지다. 주변을 자세히 보면, 휴게소 종업원, 청소부 아저씨, 편의점 알바생에서 이런 사람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요즘 4차 산업 혁명이라고 많이 사람들이 떠들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겠다. 다만, 한가지, 4차 산업 혁명에는 새로운 직업관이 들어가면 좋겠다. 그래서 정부와 언론이 “직업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거기에서 행복한지가 중요하다”는 점을 부각시켜서 우리 다음 세대에는 성적순이 아닌 본인의 취향에 따라 직업이 선택되기를 바란다.
지금 이순간, 교수로서 나 자신을 돌아본다. 오늘 하루 내가 최선을 다해 살았는지, 교수로서 학생들을 위해 충분히 준비했는지를 생각해본다. 나 지신도 제대로 이끌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학생들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을까? 스승의 날이면 생각나는 스승이 없는 나 자신을 돌아보며, 아이들에게 스승의 날이면 생각나는 스승으로 남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준비하며 살아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