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배급받기 위해 3시간 넘게 줄을 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모습도 보았다. 또 4인 가족 기준으로 배급받은 죽 한 그릇이 터무니없는 양일텐데도 더 달라고 악다구니 쓰는 이가 없다. 가족을 잃었는데도 울부짖지 않고 집이 파손되어 운동장 바닥에 드러누워 있지만 절규하지 않는다.
자신의 슬픔을 드러내는 것조차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본에는 ‘마음으로 울면서 얼굴로는 웃는다’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되도록이면 상대방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마음을 쓰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다. 그렇다면 극한 재난 상황 하에서 어떻게 이처럼 감정 제어가 가능한 것일까?
문득 지난해 초가을 일본 초카이산(鳥海山)에서 만난 하타나키氏를 떠올렸다.
그는 일본인 산악 가이드로 우리 일행의 초카이산 산행 시 선두 대장을 맡아 산 길을 안내했다. 본격 산행에 앞서 몇가지 당부의 말을 조곤조곤하게 전하는 그의 태도와 몸짓, 언행에서 일본인 특유의 몸에 밴 공손함을 읽을 수 있었다.
그의 걸음걸이는 마치 물 위를 걷는 듯 독특했다.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사뿐사뿐 가벼웠다. 너나없이 흉내내 보았지만 어림없다. 그의 신통방통한 걸음은 산행 9시간 내내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일정했다.
산길을 걷다가도 다른 산객들의 기척만 들려도 길 가장자리로 비켜서서 기다렸다가 진행했고 좁은 숲길에서 옷깃만 스쳐도 자동적으로 ‘스미마셍’이 튀어나왔다.
궁금해서 물어봤다.
“저벅저벅 묵직하게 걷지 않고 사뿐사뿐 가볍게 걸으면 무릎 연골도 아낄 수 있으며 발자국 소리나 흙먼지를 일으키지 않아 함께 걷는 일행들에게 폐를 덜 끼치게 되지요. 또 우리는 친구들이나 가족이 함께 길을 걸을 때도 나란히 서서 길을 독차지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한 줄로 걷거나 아니면 제자리에 서서 지나갈 길은 터 놓습니다.”
이처럼 일본인들은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어려서부터 ‘남에게 폐(迷惑·메에와쿠) 끼치지 말라’는 교육을 반복적으로 받아와 몸에 밴 탓이다.
또하나 이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말이 있다. 바로 ‘준반(順番)’이다. 우리 말의 ‘차례’이다.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준반’이란 말을 귀에 따갑도록 들으며 자란다. 아이들은 놀이터 미끄럼틀 앞에서도 ‘준반’을 외치며 다투지않고 익숙하게 줄을 서 차례를 기다릴 줄 안다.
지진 재해로 대피소 생활을 피할 수 없게 된 많은 일본인들은 비관적인 현실 앞에서도 의연하게 참을 수 있는 것은 이처럼 어릴적부터 반복적 학습을 통해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겉마음과는 달리 본심은 땅을 치며 통곡 할 일이 왜 아니겠는가.
재난 때마다 일본인들의 질서의식은 지구촌의 화젯거리로 회자된다. 이번에도 예외없이 침착한 대응과 넘치는 배려의 모습이 영상으로, 활자로 매체를 장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재난 현장을 바라보는 우리의 온기가 예전같지는 않다. 일본 정부는 동일본 대지진 때 전한 우리의 온정을 왜곡과 망언으로 되갚음 했다. 이를 잊지 않아서일게다.
‘혼네(本音)’와 ‘다테마에(建前)’. 즉, 본심에서 우러나오는 말과 가식적인 겉마음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