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음양사상3 '야만적인 한국인'과 이승엽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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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한국의 국민타자 이승엽이 야구경기도중 상대 선수에게 고의로 발목을 밟힌 사태가 발생했다. 감독이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심판은 아무런 조치가 없었고, 이승엽은 묵묵히 넘어갔다. 이를 지켜본 일본과 한국의 네티즌들은 성난 목소리로 상대의 몰상식한 플레이를 질타하는 글들을 쏟아내고 있다. 일본 팬이 실은 글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고 한다.
“이승엽은 너무 얌전하다. 사람이 좋다고나 할까”
“한국인은 야만적인 이미지 였는데 의외였다”
이승엽을 칭찬한 말 속에 주목을 끄는 것은 하나는 이승엽은 참 얌전하다이고 하나는 한국인은 야만적이다는 상반된 내용이다. 다시말해서 대부분의 한국인은 야만적이지만 예외적으로 이승엽은 참 점잖다는 말이다. ‘한국인은 야만적’이란 말이 우리의 가슴을 찌른다. 왜 한국인이 야만적으로 보였을까? 필자도 아시아인들중에서 한국인은 강한 인상을 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강한’ 인상까지는 봐줄만 하다. 그러나 ‘야만적 이미지’라니!
상대의 악의적인 행동에 대해 묵묵히 참고 넘어간다는 것은 사실 현대의 한국인으로서는 보기 드문 행동이 되어버렸다. 지금은 거의 사라져버린 인품을 나타내는 형용사가 있다. 필자가 어렸을 적 -중고등학교 시절까지- 사람을 칭찬할 때 많이 쓰이던 말중의 하나가 점잖다는 표현이었다. 또 중고등학생이던 우리들 사이에서도 누구를 칭찬할 때 ‘누구는 참 노숙老熟하다’는 말로 그 친구의 인품이 훌륭하다는 것을 나타내곤 했었다. 사실 점잖다와 노숙하다는 말은 같은 뜻이다. 젊지않다, 젊은애같지 않다는 것은 어떤 사태에 대해 애들처럼 방정맞게 떠들어대지 않고 침착하고 여유있게 잘 대처한다는 말로, 오랜 인생의 경험속에서 터득된 경륜과 지혜를 존중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필자가 노숙하다는 표현을 들어본지가 아마 십수년도 더 지난듯하다. 요즈음 텔레비전에 비치는 어른 들은 엄격한 권위를 가지고 점잖게 행동하는 모습이 아니라, 청년의 모습도 아닌 거의 애들 수준으로 그려지고 있다. 가치관이 바뀌어진 것일까? 희극배우들 뿐이 아니라, 고전사극을 제외한 현대 가정의 모습에 등장하는 아빠 할아버지들까지 모두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을 연기하고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 천진난만함까지도 좋다. 젊은 생명력을 지니고 있으니, 정체적 이미지를 가진 노숙함과는 다른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젊지 않은’이 아닌 ‘젊은’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정말로 야만적이란 말을 듣고싶지는 않다.
이승엽 부친의 말을 들어보자.
이 사건에 대해 그의 부친은 “그것이 승엽이의 참모습”이라고 하면서 “승엽이는 어릴 때부터 싸움을 싫어했다. 야구를 하면서 선배에게 맞아도 지독한 연습을 통해 그 선배를 넘어서는 것으로 복수했다” 또 “손자가 두살이 되어 사물을 분별할 줄 안다. 아들에게 싸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을 것”이라며 “어린이들 때문에 참았다”는 이승엽의 말을 뒷받침했다.
위의 말은 두가지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하나는 즉각적인 방식으로 맞대응하기 보다는 진정한 실력으로 상대를 극복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신의 어린아이를 포함해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추한 어른들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것이 음양사상이라고 생각한다. 미리 한번 더 생각해서 일을 풀어나가는 것이다.
일본인의 눈에 한국인이 야만적으로 보인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간 일본에게 당한 굴욕과 지금까지 계속되는 부당한 대우를 생각해보라. 어느 한국인이든 주먹이 불끈 쥐어지지 않겠는가? 한국인인 우리로서는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일본인의 눈에 야만적 이미지로 비춰지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한국인의 강경명정한, 다른 말로 하면 끝장을 보는 화끈한 기질이 다소 과도하게 작용했을 수 있다. 지난 과거가 미래를 위한 밑거름이 되려면, 한국이건 일본이건 모두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란 냉혹한 법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당하기만 한 쪽에서 그냥 가해자를 용서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서로가 모두 마음을 열고 상대를 진심으로 생각해줄 때 진정으로 과거 문제가 정리되고, 밝은 미래가 열릴 것이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진정한 승리자는 먼저 손을 내미는 쪽에 있다.
“이승엽은 너무 얌전하다. 사람이 좋다고나 할까”
“한국인은 야만적인 이미지 였는데 의외였다”
이승엽을 칭찬한 말 속에 주목을 끄는 것은 하나는 이승엽은 참 얌전하다이고 하나는 한국인은 야만적이다는 상반된 내용이다. 다시말해서 대부분의 한국인은 야만적이지만 예외적으로 이승엽은 참 점잖다는 말이다. ‘한국인은 야만적’이란 말이 우리의 가슴을 찌른다. 왜 한국인이 야만적으로 보였을까? 필자도 아시아인들중에서 한국인은 강한 인상을 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강한’ 인상까지는 봐줄만 하다. 그러나 ‘야만적 이미지’라니!
상대의 악의적인 행동에 대해 묵묵히 참고 넘어간다는 것은 사실 현대의 한국인으로서는 보기 드문 행동이 되어버렸다. 지금은 거의 사라져버린 인품을 나타내는 형용사가 있다. 필자가 어렸을 적 -중고등학교 시절까지- 사람을 칭찬할 때 많이 쓰이던 말중의 하나가 점잖다는 표현이었다. 또 중고등학생이던 우리들 사이에서도 누구를 칭찬할 때 ‘누구는 참 노숙老熟하다’는 말로 그 친구의 인품이 훌륭하다는 것을 나타내곤 했었다. 사실 점잖다와 노숙하다는 말은 같은 뜻이다. 젊지않다, 젊은애같지 않다는 것은 어떤 사태에 대해 애들처럼 방정맞게 떠들어대지 않고 침착하고 여유있게 잘 대처한다는 말로, 오랜 인생의 경험속에서 터득된 경륜과 지혜를 존중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필자가 노숙하다는 표현을 들어본지가 아마 십수년도 더 지난듯하다. 요즈음 텔레비전에 비치는 어른 들은 엄격한 권위를 가지고 점잖게 행동하는 모습이 아니라, 청년의 모습도 아닌 거의 애들 수준으로 그려지고 있다. 가치관이 바뀌어진 것일까? 희극배우들 뿐이 아니라, 고전사극을 제외한 현대 가정의 모습에 등장하는 아빠 할아버지들까지 모두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을 연기하고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 천진난만함까지도 좋다. 젊은 생명력을 지니고 있으니, 정체적 이미지를 가진 노숙함과는 다른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젊지 않은’이 아닌 ‘젊은’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정말로 야만적이란 말을 듣고싶지는 않다.
이승엽 부친의 말을 들어보자.
이 사건에 대해 그의 부친은 “그것이 승엽이의 참모습”이라고 하면서 “승엽이는 어릴 때부터 싸움을 싫어했다. 야구를 하면서 선배에게 맞아도 지독한 연습을 통해 그 선배를 넘어서는 것으로 복수했다” 또 “손자가 두살이 되어 사물을 분별할 줄 안다. 아들에게 싸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을 것”이라며 “어린이들 때문에 참았다”는 이승엽의 말을 뒷받침했다.
위의 말은 두가지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하나는 즉각적인 방식으로 맞대응하기 보다는 진정한 실력으로 상대를 극복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신의 어린아이를 포함해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추한 어른들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것이 음양사상이라고 생각한다. 미리 한번 더 생각해서 일을 풀어나가는 것이다.
일본인의 눈에 한국인이 야만적으로 보인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간 일본에게 당한 굴욕과 지금까지 계속되는 부당한 대우를 생각해보라. 어느 한국인이든 주먹이 불끈 쥐어지지 않겠는가? 한국인인 우리로서는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일본인의 눈에 야만적 이미지로 비춰지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한국인의 강경명정한, 다른 말로 하면 끝장을 보는 화끈한 기질이 다소 과도하게 작용했을 수 있다. 지난 과거가 미래를 위한 밑거름이 되려면, 한국이건 일본이건 모두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란 냉혹한 법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당하기만 한 쪽에서 그냥 가해자를 용서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서로가 모두 마음을 열고 상대를 진심으로 생각해줄 때 진정으로 과거 문제가 정리되고, 밝은 미래가 열릴 것이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진정한 승리자는 먼저 손을 내미는 쪽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