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에서 가장 북쪽, 38선 너머 휴전선 바로 밑, 임진강변 농가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곳에는 라디오가 없어 마을 대표인 이장(里長)댁에서 공동으로 틀어 주는 고정방송만 들을 수 있었다. 버스는 하루에 두 번 다녔고, 군용차량과 훈련용 탱크는 온 마을을 헤집고 다녔다.

그런 곳에 학교라고는 서당(書堂)과 초등학교가 있었다. 중학교는 다행스럽게도 군 소재학교의 분교가 있었으나 아주 작은 학교였다. 초등학교 3학년까지 서당을 다니면서 천자문을 읽고 명심보감을 시작할 때쯤, 서당 훈장님께서 서당문을 닫으셨다. 그 때 유일하게 여러 번 읽은 책이 천자문이었다. 학교에는 책이 별로 없었고, 마을이나 가정집에는 책 몇 권 있는 집도 거의 없었다. 어쩌다가 서울의 친지를 방문할 때면 한두 권씩 얻어가는 책이 고작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를 간 것이 지방학생의 서울진학 마지막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고 직장생활을 시작할 때까지 먹고 사는 일에 매달려 책 사는 일에 게을리 했다. 그러던 중, 가정경제사정이 나아지는 기미가 보이자 드디어 서점가는 일을 취미로 즐길 수 있었다.

지금까지 30년 넘게 지켜온 습관 한가지는 매월 한두 번씩 서점나들이를 가서 책을 사 들고 오는 거였다. 인터넷에서 사면 싼 것을 알지만 그래도 서점에 가서 사야 직성이 풀리고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이사를 다닐 때마다 가장 힘든 골치거리가 책을 옮기는 일이다. 천여 권이 넘는 책 중에서 수시로 버릴 것을 찾고 다른 곳에 주려고 정리를 하지만 좀처럼 줄어 들지 않는다. 아마도 책에 대한 욕심이 지나치기 때문일 게다. 읽지도 않으면서 사 놓은 책도 적지 않다. 한 장도 넘기지 않는 책을 보면 미안하고 부끄럽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며칠 전, 추석 연휴를 맞아 다시 책 정리 작업에 들어갔다. 고르고 골라 보지만 버릴 게 없다. 그렇다고 쌓아 둔 책을 언제 다시 읽을 건지 기약도 할 수 없다. 그냥 버리기 아깝고 남 주기도 쉽지 않은 욕심 때문이라는 걸 모르는 바 아니다.

그래서 지난 주말엔 좋은 결심을 하나 했다.

“책을 사지 말자. 더 이상 사지 말고, 더 이상 책을 읽지 말자.”


그런데 자신이 없다. 이런 허무맹랑한 자신과의 약속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닌데, 그런 약속이라도 하고 싶다.

그런데 또 서점엘 갔다. 버트란트 러셀의 서양철학사와 미학산책 등 두어 권의 책을 샀다. 이렇게 두꺼운 책을 언제 다 읽을 수 있을지 또 걱정이다.

주말마다 신문에 소개되는 새 책을 훑어 보며 또다시 좋은 책을 골라 본다. 책 사는 것도 중요한 낭비 버릇 중의 하나이다. 이를 어쩌면 좋을지 대책이 없다. 그냥 이렇게 낭비하며 살아도 될지 모르겠다.

정말 책을 사지 말아야지. 또 다시 결심한다.

“쓸데 없는 책, 읽지 말아야지.”

아리스토텔레스가 “책의 미혹으로부터 벗어 나라.”고 했다는데,

“그래도 좋은 책은 죽을 때까지 읽어야지.”

하루에도 열두 번씩 결심하고 결심을 바꾸고, 갈등과 고민 속에 빠진다.

그래도 책과의 전쟁은 즐겁기만 하다. 病인 줄 알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