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무십일홍
매화그림이다
사군자는 못치지만 들은 풍월은 있다
그림 좋으면 글이 뒤쳐지고
글이 좋으면 그림이 못따라간단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옛가지의 여유와 새가지의 힘이 조화를 이룬다
꾸밈없이 휘갈긴 일필휘지는 그린이의 호방함을 잘 보여준다

괜찮은 이 그림은 참 이상한 곳에 있는 그림이다
말 한 마디로 날던 새도 떨어뜨린다던 중앙정보부 석관분실
신이문역에서 걸어서 20분쯤 되는 거리에 있던 무섭던 곳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그 중앙정보부가 원래는 의릉이다

의릉은 조선 20대 경종과 그 비 선의왕후를 모신 곳이다
경종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장희빈과 숙종의 아드님으로
4년이라는 짧은 재임과 36세를 일기로 승하하신 분이다
그 비 선의왕후 또한 26세로 생을 마감하신 불운의 왕비이다
짐작컨데 경종이 병약하였다는 역사적 사실 또한 의문이다
그 비 선의왕후가 26세에 운명을 달리한 것을 보면
아마도 서인과 남인의 권력의 암투에서 희생양이 된 듯하다

위 매화그림은 의릉 앞에 있는 작은 식당의 벽에 있는 그림이다
그 식당은 의릉 정면 앞 주택가에 자리잡고 있다
아담한 한옥집을 개조하여 만든 식당인데 이름이 광포당이다
광포당은 원래 중앙정보부 시절 아주 잘 나가던 요정이었다
내로라하던 사람들이 드나들던 곳이다
그 뒤 중앙정보부가 이사를 가고 없어지고 세월이 변하여
이젠 맛깔스런 음식에 반한 몇몇 식객들이 찾는 작은 한식집이 되었다

이 매화그림은 표구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낡은 벽에 그대로 그렸다
아마 당시의 문인화 대가가 그렸든지
아니면 문인화를 사랑하던 정객이 그렸을 것이다
문인화에 문외한이어서 낙관으로 그린이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주인이 새로 도배를 하지 않고 벽의 매화를 그대로 살린 것으로 보아
아마도 어떤 위치에서든지 그 시대를 주름잡던 이가 그렸을 것이다

누렇게 변색이 된 매화
세월은 흐르고 흘러
권력도 따라 흐르고 흘러
세상은 상전벽해가 된 지 수십년이지만
새삼 지금 생각해보아도 권력이라는 것
화무십일홍이다

씨를 맺는 꽃은 모두 열흘 넘게 피는 것을 보지 못했다
꽃은 식물의 얼굴이면서 생식기관이면서 대를 잇는 도구이다
꽃이 피어야지만 씨를 맺기 때문에 식물은 온힘을 다해서 꽃을 피운다
바람이나 벌나비에 의해 꽃이 수정이 된 후는 꽃은 씨를 맺는데 온힘을 다해야 한다
그러므로 꽃이 수정이 된 후는 식물은 그 꽃을 더 이상 피우지 않는다
이제는 힘을 씨를 맺는 데 쏟아야 하기 때문이다
화무십일홍
중앙정보부는 두려움의 대명사이었다
중앙정보부는 1962년 의릉을 접수하여 1996년 국민에게 돌려줄 때까지
의릉을 훼손하면서 권력의 참맛을 누렸다
의릉 주변에 어마어마한 건물들을 지었다
의릉 안에 거대한 연못을 파고 그 연못가에서 천장산의 그 아름다움에 파묻혀
화무십일홍의 봄꿈을 꾸었을 것이다

의릉은 내가 알기로는 유일하게 연못을 품고 있는 왕릉이다
일년 내내 경치가 좋기로 이름이 나 있다
의릉에 들러 경치를 구경하고 연못(큰 연못을 다 메우고 일부만 남았다)을 보면서
권력의 무서움과 허망함을 느끼면서
광포당에 들러 점심을 먹으면서
화무십일홍에 대하여 생각에 잠겨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세월은 가고 사람도 가고 권력도 가지만
그림은 남아 있고 풍경도 남아 있다
꽃은 지지만 씨가 남듯이
사람은 가도 그가 남긴 참빛만은 한톨의 씨앗이 되어
우리 곁에서 늘 꽃피고 우리를 아름답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