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엘스비어 측, 편집진에 '램지어 관련 함구' 요청한 듯
학계 "출판사가 학문 진실성에 관여하면 안 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매춘부'로 묘사해 비판에 휩싸인 마크 램지어 미국 하버드대 교수 논문의 처리 방향을 학술지 편집진이 아닌 출판사가 직접 결정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학계에서는 전문가들로 구성된 편집진이 아니라 출판사가 연구의 진실성을 직접 판단하는 것은 부적절한 일이라는 반응을 내놓고 있다.

국제법경제리뷰(IRLE)를 발행하는 네덜란드 출판사 엘스비어의 내부 소식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24일(현지시간) 연합뉴스에 IRLE 편집자들과 엘스비어 간 계약에 따라 편집진이 아닌 출판사가 논문에 관해 최종적으로 결정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IRLE 편집자들은 엘스비어에 고용된 계약자 신분일 뿐이라는 것이 이 관계자의 전언이다.

특히 엘스비어는 저널 편집자들에게 램지어 교수의 논문 '태평양 전쟁의 성 계약'을 둘러싼 논란과 관련해 '공개 언급하지 말아달라'며 함구를 요청했다고 한다.

실제로 연합뉴스가 IRLE 편집자 4명에게 이메일로 문의한 결과 3명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고, 나머지 1명은 "엘스비어의 앤드루 데이비스 부사장이 답할 것"이라고만 답장을 보냈다.

데이비스 부사장은 이런 내용에 관한 연합뉴스의 질의에 답변하지 않고 있다.

엘스비어의 대처는 램지어 교수의 다른 논문에 대한 영국 케임브리지대 학술지 측의 적극적인 움직임과 대비된다.

간토(關東) 대지진 조선인 학살을 왜곡한 램지어 교수 논문을 오는 8월 출판할 예정이었던 '케임브리지 민영화 핸드북'의 공동 편집장인 이스라엘 교수들은 역사학자들의 문제 제기를 전달해 램지어 교수에게 "상당히 수정"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엘스비어와 달리 케임브리지 학술지에서는 편집을 맡은 학자들이 주도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볼 수 있다.

램지어 교수 논문을 공개 반박한 알렉시스 더든 코네티컷대 교수는 연합뉴스 취재 내용에 관한 질의에 "이런 일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말했다.

더든 교수는 이메일 인터뷰에서 "단순한 표절 사건이 아니라면 출판사가 관여해서는 안 된다"며 "램지어 교수의 논문은 단순 표절이 아니라 팩트 조작이라는 학문적 진실성에 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학계 인사도 "통상적인 대응이라고 볼 수 없다"고 반응했다.

더구나 엘스비어는 램지어 교수 논문에 관한 연합뉴스 등 국내 언론의 질의에 사태 초기부터 "조사가 진행 중"이라면서도 "그 논문은 IRLE 3월호에 배정됐고 이는 최종적인 것으로 간주된다"는 모순적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조사 결과와 무관하게 '우려 표명'의 글 등을 첨부하는 수준에서 문제의 논문을 그대로 출판하겠다는 결론을 미리 정했다고 읽힐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일각에서는 램지어가 현직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라는 점도 엘스비어의 태도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세계 최고 명문대의 법학전문대학원이라는 점에서 출판사와 편집진이 법적 대응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을 수 있다는 추정이다.

더든 교수는 "하버드라는 글로벌 브랜드는 학계의 많은 사람을 두렵게 만든다"면서 "경력의 정점에 달한 하버드의 교수가 논문을 제출하거나 출판을 요청했을 때 '당신이 사실을 지어냈다'고 반응하기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암스테르담에 본사를 둔 엘스비어는 과학기술 전문 국제학술 출판사로 랜싯, 셀을 포함해 매년 2천500여종의 학술 저널과 2만여 권의 단행본을 출판한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