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이주민 인권 활동가 청년 김정우 "모두 함께 사는 세상 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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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100만 불체자에 美시민권 주는 법안 통과 위해 힘쓰는 김정우 씨
"공짜로 일자리를 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세금을 안 내겠다는 주장도 아니고요.
그저 이방인 역시 다른 사람과 어울려 똑같이 살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 달라는 겁니다.
"
미국한인단체인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NAKASEC)에 소속돼 인권 활동가로 일하고 있는 김정우(37) 씨는 최근 다시 바빠지기 시작했다.
미국 내 불법체류자 1천100만 명에게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바이든표 이민개혁법안'이 공개됐기 때문이다.
법안은 이들이 신원조사를 통과하고 세금 납부 등의 요건을 충족하면 5년 뒤 영주권을 받고 3년 후에는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도록 한 것을 골자로 한다.
1999년 처음 미국에 온 뒤로 줄곧 이주민 문제 해결에 앞장서고 있는 김 씨는 25일 연합뉴스와 화상 인터뷰를 갖고 "미국에 사는 한인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방인에게는 중요한 시점"이라며 "이들의 상황이 조금이나마 개선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중학생 때 누나와 함께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에 왔어요.
운동선수가 되겠다는 '아메리칸드림'도 있었고요.
지금 인권 운동을 하고 있으니 꿈이 크게 틀어진 건 아닌가 보네요.
하하."
미국 생활에 적응하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초반 의사소통에 어려움은 있었지만 밝은 성격 덕에 친구들과도 금세 어울렸고, 보통의 10대 소년처럼 평범하게 지냈다.
문제는 고교 졸업을 앞두고 생겼다.
미국 수학능력적성검사(SAT)에서 괜찮은 점수를 따냈고,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로부터 합격 통보도 받았다.
등록 과정에서 학교 측은 그에게 미국 주민등록번호 격인 '사회보장번호'(SSN)를 요구했고, 이것이 없다는 이유로 내국인보다 10배나 비싼 등록금을 요구했다.
김 씨는 "그때 처음으로 내가 미국 내 합법적인 지위가 없는 '서류미비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며 "다른 친구들과 다른 처지라는 것을 깨달았던 순간"이라고 기억했다.
그는 "한국의 불법체류자와 유사한 개념이지만 꼭 '서류미비자'(undocumented)라고 써달라"며 "법을 어긴 게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식으로 시민권을 신청하는 방법도 모색했으나 한번 낙인이 찍힌 신분을 바꾸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화가 났고 다른 이들과 동일한 권리를 찾고 싶었다.
2006년 무료 법률상담을 해주는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캘리포니아 지역에 있는 대학 10여 곳을 상대로 소송했고, 2008년 입학 허가를 받아냈다.
그는 "권리를 찾기 위해 싸웠고, 성취감도 느꼈다"며 "내 노력으로 주변 환경이 조금씩 개선되는 게 좋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식 시민권자가 아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고, 아무리 경력이 쌓여도 급여가 오르지 않았다.
아파도 병원을 찾거나 약을 사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운이 따랐다고 그는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한 2012년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으로 건너온 해외 청년들이 걱정 없이 학교와 직장을 다닐 수 있도록 추방을 유예한 '다카'(DACA) 제도를 도입했다.
다카 수혜자인 일명 '드리머'(Dreamers)의 경우 즉시 영주권을, 3년 뒤에는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다.
그러나 강경한 이민정책을 추진해온 트럼프 행정부는 2017년 9월 다카의 신규 신청을 중단했고 기존 수혜자의 혜택을 폐지하겠다고 밝히면서 80만 명의 청년이 미국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게 됐다.
당시 재미 한인 청년 1만 명도 추방 대상에 포함되는 것으로 추산돼 한인 사회도 비상이 걸리기도 했다.
"그때 화가 났던 이유는 미국 사회의 약자층이라 할 수 있는 청년 이방인에게 최후의 보호책마저 빼앗으려 들었다는 점이에요.
너무 비인간적으로 느껴졌어요.
지켜야겠다고 결심했죠."
김 씨는 드리머의 법적 지위를 보장하는 법안 통과를 위해 관련된 상하원의원의 사무실을 방문하거나, 거리 집회를 열었고 서명운동도 벌였다.
당시 활동이 화제에 오르면서 미 CNN 방송과 인터뷰를 갖기도 했다.
몇 년간의 투쟁은 최근 바이든 정부가 비시민권자의 추방을 100일간 유예하고 다카 제도의 유지·강화하겠다는 반가운 결과로 이어졌다.
김 씨는 현재 이민개혁법안 통과를 위해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를 비롯해 여러 이주단체와 연계해 의원실에 지지를 요청하는 전화를 걸고, 온오프라인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는 "미국에 사는 이주민의 생존에 가장 밀접한 영향을 미치는 법안"이라며 "이미 몇 차례 통과에 실패했고, 이번에도 쉽지는 않겠지만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세상은 원래 불공평한 것'이라고 여기는 이들도 있지만 그런 상황에 순응할 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개선하도록 노력하는 게 맞지 않느냐"며 "한인뿐만 아니라 미국에 사는 이주민의 권익 보호를 위해 앞으로도 힘쓸 것"이라고 다짐했다.
/연합뉴스
"공짜로 일자리를 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세금을 안 내겠다는 주장도 아니고요.
그저 이방인 역시 다른 사람과 어울려 똑같이 살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 달라는 겁니다.
"
미국한인단체인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NAKASEC)에 소속돼 인권 활동가로 일하고 있는 김정우(37) 씨는 최근 다시 바빠지기 시작했다.
미국 내 불법체류자 1천100만 명에게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바이든표 이민개혁법안'이 공개됐기 때문이다.
법안은 이들이 신원조사를 통과하고 세금 납부 등의 요건을 충족하면 5년 뒤 영주권을 받고 3년 후에는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도록 한 것을 골자로 한다.
1999년 처음 미국에 온 뒤로 줄곧 이주민 문제 해결에 앞장서고 있는 김 씨는 25일 연합뉴스와 화상 인터뷰를 갖고 "미국에 사는 한인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방인에게는 중요한 시점"이라며 "이들의 상황이 조금이나마 개선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중학생 때 누나와 함께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에 왔어요.
운동선수가 되겠다는 '아메리칸드림'도 있었고요.
지금 인권 운동을 하고 있으니 꿈이 크게 틀어진 건 아닌가 보네요.
하하."
미국 생활에 적응하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초반 의사소통에 어려움은 있었지만 밝은 성격 덕에 친구들과도 금세 어울렸고, 보통의 10대 소년처럼 평범하게 지냈다.
문제는 고교 졸업을 앞두고 생겼다.
미국 수학능력적성검사(SAT)에서 괜찮은 점수를 따냈고,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로부터 합격 통보도 받았다.
등록 과정에서 학교 측은 그에게 미국 주민등록번호 격인 '사회보장번호'(SSN)를 요구했고, 이것이 없다는 이유로 내국인보다 10배나 비싼 등록금을 요구했다.
김 씨는 "그때 처음으로 내가 미국 내 합법적인 지위가 없는 '서류미비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며 "다른 친구들과 다른 처지라는 것을 깨달았던 순간"이라고 기억했다.
그는 "한국의 불법체류자와 유사한 개념이지만 꼭 '서류미비자'(undocumented)라고 써달라"며 "법을 어긴 게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식으로 시민권을 신청하는 방법도 모색했으나 한번 낙인이 찍힌 신분을 바꾸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화가 났고 다른 이들과 동일한 권리를 찾고 싶었다.
2006년 무료 법률상담을 해주는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캘리포니아 지역에 있는 대학 10여 곳을 상대로 소송했고, 2008년 입학 허가를 받아냈다.
그는 "권리를 찾기 위해 싸웠고, 성취감도 느꼈다"며 "내 노력으로 주변 환경이 조금씩 개선되는 게 좋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식 시민권자가 아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고, 아무리 경력이 쌓여도 급여가 오르지 않았다.
아파도 병원을 찾거나 약을 사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운이 따랐다고 그는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한 2012년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으로 건너온 해외 청년들이 걱정 없이 학교와 직장을 다닐 수 있도록 추방을 유예한 '다카'(DACA) 제도를 도입했다.
다카 수혜자인 일명 '드리머'(Dreamers)의 경우 즉시 영주권을, 3년 뒤에는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다.
그러나 강경한 이민정책을 추진해온 트럼프 행정부는 2017년 9월 다카의 신규 신청을 중단했고 기존 수혜자의 혜택을 폐지하겠다고 밝히면서 80만 명의 청년이 미국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게 됐다.
당시 재미 한인 청년 1만 명도 추방 대상에 포함되는 것으로 추산돼 한인 사회도 비상이 걸리기도 했다.
"그때 화가 났던 이유는 미국 사회의 약자층이라 할 수 있는 청년 이방인에게 최후의 보호책마저 빼앗으려 들었다는 점이에요.
너무 비인간적으로 느껴졌어요.
지켜야겠다고 결심했죠."
김 씨는 드리머의 법적 지위를 보장하는 법안 통과를 위해 관련된 상하원의원의 사무실을 방문하거나, 거리 집회를 열었고 서명운동도 벌였다.
당시 활동이 화제에 오르면서 미 CNN 방송과 인터뷰를 갖기도 했다.
몇 년간의 투쟁은 최근 바이든 정부가 비시민권자의 추방을 100일간 유예하고 다카 제도의 유지·강화하겠다는 반가운 결과로 이어졌다.
김 씨는 현재 이민개혁법안 통과를 위해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를 비롯해 여러 이주단체와 연계해 의원실에 지지를 요청하는 전화를 걸고, 온오프라인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는 "미국에 사는 이주민의 생존에 가장 밀접한 영향을 미치는 법안"이라며 "이미 몇 차례 통과에 실패했고, 이번에도 쉽지는 않겠지만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세상은 원래 불공평한 것'이라고 여기는 이들도 있지만 그런 상황에 순응할 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개선하도록 노력하는 게 맞지 않느냐"며 "한인뿐만 아니라 미국에 사는 이주민의 권익 보호를 위해 앞으로도 힘쓸 것"이라고 다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