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엽의 논점과 관점] 대책 또 대책…이게 국가주의다
‘식량은 없는데 식량 대책은 넘치고, 장작은 없는데 땔감 대책만 넘치는 체제.’ 《닥터 지바고》의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촌철살인이다. 혁명의 열기가 뒤덮은 조국 소련과 동구 공산체제의 모순, 비효율을 일상의 언어로 직격한 대문호의 직관이 빛난다.

‘파스테르나크 감별법’으로 보면 문재인 정부는 다분히 국가사회주의적이다. 지난 4년간 발표한 부동산 안정 대책만 25번으로, 거의 50일에 한 번꼴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시장은 폭발했고 이제 서민과 청년의 내집 마련 꿈은 ‘미션 임파서블’이다. 일자리도 마찬가지다. 정권 출범 직후 떠들썩하게 일자리 상황판과 일자리위원회를 설치했다. ‘40대 고용증대 범부처TF’를 꾸리는 등 별의별 대책이 다 등장했다. 그런데 결과는 일자리 실종이다.

대책만 요란, 집·일자리는 실종

대책에 대책을 거듭해도 안 되자 ‘특단 대책’ 동원령이 내려졌다. 1년 전보다 실업자가 100만 명이나 늘자 며칠 전 대통령이 “기존 대책을 넘어서는 특단 대책”을 지시한 것이다. 부동산 시장 역시 특단 모드다. ‘토지소유권 강탈’ 논란을 감수하면서까지 ‘닭장 아파트’ 특단 공급에 올인 중이다.

국가사회주의라니 말이 되느냐고 하겠지만 쌓이는 징후는 만만찮다. ‘21세기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베네수엘라에만 있다는 부동산거래감시기구 설치가 눈앞이다. 여당 실세 의원은 ‘1가구 1주택’으로 집 소유를 제한하는 법안까지 냈다. 대통령의 특단 고용대책 지시는 부처별 일자리 강제 할당이라는 전근대적 행정을 부활시켰다.

일련의 흐름은 한국이 국가사회주의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국가주의로 경사되고 있다는 신호다. 국가주의는 경제 사회에 대한 권력의 통제를 주장하는 신조로, 국가사회주의까지 포괄한다. 실제로 부동산·일자리 정책을 넘어 국정 전반에서 국가 개입이 위험 수위다. 스튜어드십 코드를 앞세운 국민연금의 노골적인 상장사 경영 간섭이 대표적이다. ‘국민연금이 기업 압박에 나서야 한다’고 대놓고 요구하는 여당의 모습은 ‘연금 사회주의’ 도래의 징표다. 이익공유제 사회연대기금 밀어붙이기도 막무가내다.

"내가 선악 판단" 권력의 오만

국가가 선악 판단에서 우월하다고 믿는 그릇된 국가주의의 확산은 참혹한 후과를 부른다. 현 정부 1호 정책인 ‘비정규직 제로 선언’의 결과를 보면 분명하다. 시퍼런 권력을 앞세워 정규직 전환에 올인했지만 4년간 비정규직은 94만 명 폭증했다. 박근혜(53만 명) 이명박(22만 명) 정부의 각각 두 배와 네 배다. 현금을 뿌리며 ‘포용국가’를 부르짖었지만 빈부격차도 사상 최대다. 코로나 탓이 아니다. 정확히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시작됐다.

몇몇 개입 정책의 부작용보다 더 핵심적인 문제는 국가주의에 대한 집권세력의 무감각이다. 기업들이 사활을 걸고 벌이는 특허소송에 총리가 “나라 부끄럽다”며 화해를 강요한 장면은 국가주의 범람의 분명한 방증이다. “국익을 생각하라”는 꾸지람에서 ‘권력이 공정의 집행자’라는 오만이 넘친다. 유력 정치인들이 ‘문재인 보유국’을 낯뜨겁게 칭송해대고 “대통령에게 무한 충성하라”고 공무원을 협박하는 대목도 걱정을 더한다. 국가와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동일시하는 게 국가주의의 주요 특징이어서다.

국가주의 확산의 진원지는 청와대다. 문 대통령은 헌법에도, 국가재정법에도 근거를 찾기 힘든 ‘전 국민 위로금’ 지급을 약속했다. 최악의 국가주의 체제인 북한 지도자가 ‘이밥에 소고기’를 돌렸다는 소식만큼이나 낯설고 이질적이다. ‘K민주주의’의 궤도 이탈이 낯부끄럽다.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