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수단 축구 대부' 임흥세 "전쟁 신음하던 곳에 희망 심어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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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한일 월드컵에서 우리가 이탈리아와 맞붙었던 16강전 기억하세요? 당시 안정환 선수가 넣은 골든골로 얻은 건 단순한 1승이 아니라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라고 하잖아요.
지금 남수단 분위기가 딱 그렇습니다.
" 임흥세(66) 남수단 축구대표팀 총감독은 남수단 축구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내전이 한창이던 2014년 이곳을 처음 찾은 뒤 선수 육성과 인프라 구축에 힘써왔기 때문이다.
고(故) 이태석 신부와 함께 선한 영향력을 미친 이방인이라는 평을 받을 정도다.
임 감독이 이끄는 남수단 20세 이하 축구대표팀은 새로운 역사를 썼다.
지난해 12월 탄자니아에서 열린 동아프리카(CECAFA) U-20 챔피언십 3∼4위전에서 케냐를 2-1로 꺾고 3위에 오른 것이다.
남수단 축구 역사상 국제대회에서 4강에 오른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 축구와 교류를 활성화하는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1년여 만에 모국을 찾은 그는 10일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갖고 "영상 50도까지 치솟는 나라에 살다가 영하 20도인 곳에 오니 정신이 하나도 없다"며 "롱패딩 점퍼를 입고 잠을 청할 정도로 추위에 적응하기가 힘들지만 그래도 고향에 오니 참 좋다"고 말했다.
"남수단에서 축구는 더 이상 단순한 경기가 아닙니다.
기나긴 전쟁으로 삶의 의욕조차 잃고 패배 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이들에게 '우리도 노력만 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정신을 심어줬으니까요.
"
남수단 축구대표팀은 작년 12월 대회에서 우간다와 탄자니아 등을 물리쳤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남수단에 식량이나 기초 생활 물품 등을 공급해줬던 이웃 나라다.
축구대표팀을 창단한 지 10년도 안 된 남수단이 이제까지 감히 넘볼 수조차 없던 나라들을 이긴 것이다.
임 감독은 "우리가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룩할 때 유행한 '꿈은 이루어진다'는 정신이 남수단 청소년을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다"며 "열기도 당시 한국에 못지않다"고 말했다.
승전보를 들고 금의환향해 남수단 정부가 마련한 카퍼레이드 선두에 선 그의 머릿속에는 남수단을 처음 찾은 시절이 스쳐 지나갔다.
잔디 구장은 커녕 흔한 운동장마저 없어 일일이 주먹만 한 자갈을 골라냈던 환경, 축구공이 부족해 구멍 난 곳을 기워 쓰던 모습, 기본적인 식사조차 준비하기 어려웠던 현실.
집 바로 앞에서는 폭탄이 터졌고, 옆에 가던 사람이 총에 맞아 쓰러지기도 했다.
그는 이 같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급성장을 이룬 비결로 한국축구가 보낸 온정의 손길을 꼽았다.
대한축구협회가 마련한 유소년 유망주를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골든 에이지 프로그램'을 적극 벤치 마킹해 남수단에 이식했고, 재능이 보이는 아이들을 한국으로 유학 보냈다.
한국 스포츠 기업은 유니폼과 축구화 등을 기부했다.
그는 "남수단은 아프리카에서 키가 큰 민족이고 운동신경이 좋다"며 "기본기만 잘 닦아 놓는다면 머지않아 가나와 코트디부아르 등 같은 대륙의 강팀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이어 "이제 남수단 축구선수의 가장 큰 꿈은 K리그에서 뛰는 것"이라며 "한국 인식이 좋게 심어진 데 일조한 것 같아 뿌듯하다"고 웃었다.
한국을 찾은 이유는 또 있다.
남수단 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을 겸하고 있기에 올해 열리는 일본 도쿄(東京) 올림픽과 관련해 국내 체육계 관계자들의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다.
남수단은 육상과 태권도, 복싱 등 약 10명의 선수가 출전할 예정이다.
그가 한국에 머무는 시간은 한 달 남짓이다.
남수단에 돌아가면 올림픽대표팀 운영과 축구대표팀 구성 등 할 일이 많이 쌓였다고 한다.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 같은 답을 내놨다.
"제가 1956년생이거든요.
한국전쟁 정전 3년 후에 태어났어요.
남수단을 보면 어릴 적 생각이 많이 나요.
전쟁이 휩쓸고 간 곳에서 보릿고개를 버티던 배고픈 시절 말입니다.
그런 경험을 겪었는데 여길 떠날 수 있나요? 잘해준 게 별로 없는 남편이라 아내한테 미안하긴 하지만요.
남수단 국민이 자신감을 찾고 아름다운 국가로 일어날 수 있을 때까지 돕고 싶습니다.
"
/연합뉴스
지금 남수단 분위기가 딱 그렇습니다.
" 임흥세(66) 남수단 축구대표팀 총감독은 남수단 축구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내전이 한창이던 2014년 이곳을 처음 찾은 뒤 선수 육성과 인프라 구축에 힘써왔기 때문이다.
고(故) 이태석 신부와 함께 선한 영향력을 미친 이방인이라는 평을 받을 정도다.
임 감독이 이끄는 남수단 20세 이하 축구대표팀은 새로운 역사를 썼다.
지난해 12월 탄자니아에서 열린 동아프리카(CECAFA) U-20 챔피언십 3∼4위전에서 케냐를 2-1로 꺾고 3위에 오른 것이다.
남수단 축구 역사상 국제대회에서 4강에 오른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 축구와 교류를 활성화하는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1년여 만에 모국을 찾은 그는 10일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갖고 "영상 50도까지 치솟는 나라에 살다가 영하 20도인 곳에 오니 정신이 하나도 없다"며 "롱패딩 점퍼를 입고 잠을 청할 정도로 추위에 적응하기가 힘들지만 그래도 고향에 오니 참 좋다"고 말했다.
"남수단에서 축구는 더 이상 단순한 경기가 아닙니다.
기나긴 전쟁으로 삶의 의욕조차 잃고 패배 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이들에게 '우리도 노력만 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정신을 심어줬으니까요.
"
남수단 축구대표팀은 작년 12월 대회에서 우간다와 탄자니아 등을 물리쳤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남수단에 식량이나 기초 생활 물품 등을 공급해줬던 이웃 나라다.
축구대표팀을 창단한 지 10년도 안 된 남수단이 이제까지 감히 넘볼 수조차 없던 나라들을 이긴 것이다.
임 감독은 "우리가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룩할 때 유행한 '꿈은 이루어진다'는 정신이 남수단 청소년을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다"며 "열기도 당시 한국에 못지않다"고 말했다.
승전보를 들고 금의환향해 남수단 정부가 마련한 카퍼레이드 선두에 선 그의 머릿속에는 남수단을 처음 찾은 시절이 스쳐 지나갔다.
잔디 구장은 커녕 흔한 운동장마저 없어 일일이 주먹만 한 자갈을 골라냈던 환경, 축구공이 부족해 구멍 난 곳을 기워 쓰던 모습, 기본적인 식사조차 준비하기 어려웠던 현실.
집 바로 앞에서는 폭탄이 터졌고, 옆에 가던 사람이 총에 맞아 쓰러지기도 했다.
그는 이 같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급성장을 이룬 비결로 한국축구가 보낸 온정의 손길을 꼽았다.
대한축구협회가 마련한 유소년 유망주를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골든 에이지 프로그램'을 적극 벤치 마킹해 남수단에 이식했고, 재능이 보이는 아이들을 한국으로 유학 보냈다.
한국 스포츠 기업은 유니폼과 축구화 등을 기부했다.
그는 "남수단은 아프리카에서 키가 큰 민족이고 운동신경이 좋다"며 "기본기만 잘 닦아 놓는다면 머지않아 가나와 코트디부아르 등 같은 대륙의 강팀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이어 "이제 남수단 축구선수의 가장 큰 꿈은 K리그에서 뛰는 것"이라며 "한국 인식이 좋게 심어진 데 일조한 것 같아 뿌듯하다"고 웃었다.
한국을 찾은 이유는 또 있다.
남수단 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을 겸하고 있기에 올해 열리는 일본 도쿄(東京) 올림픽과 관련해 국내 체육계 관계자들의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다.
남수단은 육상과 태권도, 복싱 등 약 10명의 선수가 출전할 예정이다.
그가 한국에 머무는 시간은 한 달 남짓이다.
남수단에 돌아가면 올림픽대표팀 운영과 축구대표팀 구성 등 할 일이 많이 쌓였다고 한다.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 같은 답을 내놨다.
"제가 1956년생이거든요.
한국전쟁 정전 3년 후에 태어났어요.
남수단을 보면 어릴 적 생각이 많이 나요.
전쟁이 휩쓸고 간 곳에서 보릿고개를 버티던 배고픈 시절 말입니다.
그런 경험을 겪었는데 여길 떠날 수 있나요? 잘해준 게 별로 없는 남편이라 아내한테 미안하긴 하지만요.
남수단 국민이 자신감을 찾고 아름다운 국가로 일어날 수 있을 때까지 돕고 싶습니다.
"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