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나라의 살길은 기술자립"…1세대 과학자 정근모의 신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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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모 한국과학기술원 석좌교수 '기적을 만든 나라의 과학자' 출간
경기중·고 수석 입학. 만 23세 최연소 물리학 박사. 소년 교수. 한국인 최초 핵융합 연구 담당자.
대한민국 1세대 과학자인 정근모(81) 한국과학기술원(KAIST) 석좌교수를 소개할 때는 이런 이력과 함께 '천재'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다.
그는 24일 출간한 '기적을 만든 나라의 과학자'(코리아닷컴)에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과학의 불모지였던 한국이 초일류 과학입국(科學立國)의 기반을 만들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담았다.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1960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1963년 미시간주립대학교에서 응용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플로리다대학교의 조교수로 임명된 뒤 프린스턴대학교 핵융합연구소,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 핵공학과 연구 교수를 거쳐 뉴욕공과대학교 전기물리학과 부교수를 지냈다.
저자는 유학을 떠나기 전 "많이 배우고 연구해서 한국 전체의 과학기술 수준 향상에 기여해야 한다"고 했던 자신의 인생 멘토 김법린 원자력원장의 당부를 기억하고 귀국해 과학 인재 양성에 힘을 쏟는다.
"과학기술 분야의 문익점이 되라는 주문이었다"고 회상한다.
그는 KAIST 설립을 주도했으며, 두 차례 과학기술처 장관 재직 시절 고등과학원·한국과학기술한림원·국가핵융합연구소 등을 만들며 과학기술 발전 계획 수립에도 관여했다.
특히 한국형 원자력발전 기술 자립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저자는 "에너지 빈곤국에서는 원자력 에너지를 활용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원전의 안전성을 보장할 수 있는 연구개발 사업을 했다"며 미국에서 에너지 안보 문제를 다룬 사실도 설명한다.
당시 여러 보고서에서 한국이 원전 기술 자립을 추구하고 원전 산업을 체계적으로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 정부는 1968년 원전 건설을 결정하며 국민 생활과 산업 발전에 필요한 전력을 원전에서 찾았지만, 정치적 혼란기 속에서 원전 산업은 힘을 받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1982년 한국전력기술 사장으로 부임해 한국형 원전 개발에 나선다.
저자는 "가난한 나라의 살길은 오직 기술 자립뿐"이라는 신념을 바탕으로 업무를 했다고 회고한다.
한국 같은 기술 후발국이 원전과 같은 고등기술을 안전하게 사용하고 기술 자립화를 이루려면 설계 표준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우리나라 원전산업을 종속형에서 자주형으로 바꿔야 한다는 장기 비전 정책이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지속돼 결국은 (한국이) 개발도상국에서 기술선진국으로 인정받았다"며 "아랍에미리트(UAE)에 원전 4기를 성공적으로 수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원자력 분야에서의 전문성을 높이 평가받아 국제원자력기구(IAEA) 총회의장을 지낸 그는 1998년에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공학 분야 최고 석학들의 모임인 미국 공학한림원 회원이 됐다.
저자는 6·25 전쟁을 겪으며 피난지의 천막 교실에서 배웠던 시절도 언급하며 조국 재건이라는 희망 속에 공부했고 산업을 일궈 모든 국민이 잘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국내외에서 땀을 흘렸다고 설명한다.
능력이 뛰어난 후배 세대가 힘을 모아 21세기의 초일류국가 한국 시대를 열어달라는 말도 덧붙인다.
320쪽. 1만5천원. /연합뉴스
경기중·고 수석 입학. 만 23세 최연소 물리학 박사. 소년 교수. 한국인 최초 핵융합 연구 담당자.
대한민국 1세대 과학자인 정근모(81) 한국과학기술원(KAIST) 석좌교수를 소개할 때는 이런 이력과 함께 '천재'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다.
그는 24일 출간한 '기적을 만든 나라의 과학자'(코리아닷컴)에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과학의 불모지였던 한국이 초일류 과학입국(科學立國)의 기반을 만들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담았다.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1960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1963년 미시간주립대학교에서 응용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플로리다대학교의 조교수로 임명된 뒤 프린스턴대학교 핵융합연구소,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 핵공학과 연구 교수를 거쳐 뉴욕공과대학교 전기물리학과 부교수를 지냈다.
저자는 유학을 떠나기 전 "많이 배우고 연구해서 한국 전체의 과학기술 수준 향상에 기여해야 한다"고 했던 자신의 인생 멘토 김법린 원자력원장의 당부를 기억하고 귀국해 과학 인재 양성에 힘을 쏟는다.
"과학기술 분야의 문익점이 되라는 주문이었다"고 회상한다.
그는 KAIST 설립을 주도했으며, 두 차례 과학기술처 장관 재직 시절 고등과학원·한국과학기술한림원·국가핵융합연구소 등을 만들며 과학기술 발전 계획 수립에도 관여했다.
특히 한국형 원자력발전 기술 자립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저자는 "에너지 빈곤국에서는 원자력 에너지를 활용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원전의 안전성을 보장할 수 있는 연구개발 사업을 했다"며 미국에서 에너지 안보 문제를 다룬 사실도 설명한다.
당시 여러 보고서에서 한국이 원전 기술 자립을 추구하고 원전 산업을 체계적으로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 정부는 1968년 원전 건설을 결정하며 국민 생활과 산업 발전에 필요한 전력을 원전에서 찾았지만, 정치적 혼란기 속에서 원전 산업은 힘을 받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1982년 한국전력기술 사장으로 부임해 한국형 원전 개발에 나선다.
저자는 "가난한 나라의 살길은 오직 기술 자립뿐"이라는 신념을 바탕으로 업무를 했다고 회고한다.
한국 같은 기술 후발국이 원전과 같은 고등기술을 안전하게 사용하고 기술 자립화를 이루려면 설계 표준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우리나라 원전산업을 종속형에서 자주형으로 바꿔야 한다는 장기 비전 정책이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지속돼 결국은 (한국이) 개발도상국에서 기술선진국으로 인정받았다"며 "아랍에미리트(UAE)에 원전 4기를 성공적으로 수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원자력 분야에서의 전문성을 높이 평가받아 국제원자력기구(IAEA) 총회의장을 지낸 그는 1998년에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공학 분야 최고 석학들의 모임인 미국 공학한림원 회원이 됐다.
저자는 6·25 전쟁을 겪으며 피난지의 천막 교실에서 배웠던 시절도 언급하며 조국 재건이라는 희망 속에 공부했고 산업을 일궈 모든 국민이 잘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국내외에서 땀을 흘렸다고 설명한다.
능력이 뛰어난 후배 세대가 힘을 모아 21세기의 초일류국가 한국 시대를 열어달라는 말도 덧붙인다.
320쪽. 1만5천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