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in제주] 인류무형문화유산 해녀의 원조 '포작인'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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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륙금지령·여다의 섬 제주 문화 이해하려면 필수"
제주 역사 중요한 생산자…포작인의 삶 재조명 필요
제주 해녀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된 지 4년이 흘렀다.
그동안 해녀를 통해 제주 여성의 강인한 생명력과 독립성, 자연과의 공존을 추구하는 정신 등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
하지만 해녀와 함께 제주 바다에서 힘겹게 삶을 이어온 '포작인'(浦作人)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드물다.
제주의 해양문화와 해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포작인들의 파란만장한 삶의 역사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 해녀의 원조 포작인
과거 제주 사람들이 삶을 이어갔던 방편은 목축업과 농업, 어업이 대부분이었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중산간 오름 지대에서 사람들은 말과 소를 방목해 키웠다.
또 중산간에서 해안에 이르는 마을에선 사람들이 밭농사를, 해안 마을에서는 해산물을 주로 채취했다.
화산섬 제주에선 토양과 기후 등 농사짓기에 적합하지 않은 척박한 자연환경과 섬이란 특성 탓에 해산물을 채취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일까.
제주 사람들은 삶의 터전이자 각종 먹을거리를 주는 바다를 '바당밭'(바다밭)이라고 불렀다.
이 바당밭에서 어업에 종사했던 사람들이 포작인과 해녀다.
포작인은 조선시대 제주에서 어업에 종사하는 남성을 통칭한다.
제주어로 '보재기'라고 했는데, 전복을 캐거나 배를 타고 나가 고기를 잡고, 해산물을 채취해 진상하는 역할을 했다.
훗날 해녀와 구분하기 위해 편의상 해남이라 불렸다.
포작인은 해녀의 원조였다.
사람들은 해녀 이전에 포작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전복을 캐려면 수심 20m 깊은 바닷속까지도 잠수해 들어가야 하는 등 당시 사람들은 이 일을 험한 일로 여겨 여자들이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해녀는 보통 해안가에서 전복이 아닌 미역을 땄다.
실제로 역사서에서도 포작인이란 용어는 해녀보다 먼저 등장했다.
문헌에는 조선 전기인 성종조(1457∼1494년)에 포작인이라는 말이 나타났고, 현재의 해녀를 지칭하는 '잠녀'라는 말은 조선 중기에 들어 등장한다.
사실, 해녀의 원래 이름은 잠녀였다.
말 그대로 잠수하는 여성이란 뜻으로, 일제 강점기를 기점으로 오늘날 해녀라는 말로 대체됐다.
◇ '죽음의 고통' 포작인의 삶
「지아비는 포작과 선원 노릇을 겸하는 등 힘든 일이 허다하며, 지어미는 잠녀로 생활하면서 일 년 내내 미역과 전복을 마련해 바쳐야 하니 그 고역이 목자의 10배나 됩니다.
일년을 통틀어 합산하면 남자가 포작으로 바치는 것이 20여필, 여자가 바치는 것도 7∼8필에 이르니 부부가 바치는 것이 30여필에 달합니다.
」
조선 숙종 때 제주목사를 지낸 이형상(1653∼1733)은 조정에 장계를 올려 포작인과 잠녀의 어려움을 이처럼 알렸다.
포작인은 단순히 조정에 진상할 전복이나 해산물만 채취한 것은 아니었다.
진상선 등 당시 목숨을 건 뱃일 요역(조선시대 백성에게 대가 없이 부과하던 일)에 동원됐다.
조선시대 제주 사람들이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어했던 '6고역'(六苦役)이 있었는데 이는 진상을 위해 전복을 캐 올리는 포작역(鮑作役), 해조류를 채취했던 잠녀역(潛女役), 말을 기르던 목자역(牧子役, 말테우리), 귤을 재배하던 과원역(果員役), 진상품을 운반하는 배의 선원 역할을 하는 선격역(船格役, 곁꾼), 관청의 땅을 경작해주던 답한역(畓漢役) 등 6가지다.
포작인은 이 가운데 포작역과 선격역 등 이중의 고역을 떠안아야 했다.
심지어 왜구의 침략이 있을 때 수군(水軍)으로 동원되기도 하면서 풍랑을 만나 익사하거나 왜구의 칼에 죽임을 당하는 등 언제나 생사의 갈림길에 섰다.
조정에 바쳐야 할 진상품 부담이 너무나 과중했고, 중간에서 가로채는 관리들의 수탈이 심해지자 견디다 못해 다른 지역으로 도망가거나 바다에 떠돌면서 유랑하는 포작인도 많았다.
포작인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대신 그 역할을 해녀들이 짊어져야 했다.
진상해야 할 전복의 수가 많아 할당량을 채워야 했기 때문이다.
악순환은 반복됐다.
제주 여인들은 포작인의 아내가 되는 것을 기피했고, 결국 포작인들은 홀아비로 평생을 외롭게 살아야 했다.
옛날 제주 사람들은 남자아이 낳기를 꺼렸고 대신 딸을 낳길 원했다고 한다.
부모들은 딸을 낳으면 '이 애는 커서 나에게 잘 효도할 아이'라고 하며 기뻐하였지만, 아들을 낳으면 '이 애는 내 자식이 아니고 곧 바다 고래의 먹이가 될 것'이라 한탄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부(1454∼1504)의 표해록(漂海錄)에 전해져 오는 내용이다.
결국 인구이탈을 막기 위해 조선은 인조 7년인 1629년 제주에 출륙금지령을 내리는 강력한 통제정책을 폈다.
국법으로 관청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다른 지역으로 나갈 수 없도록 막아놨고, 제주 사람들은 200년 가까이 섬 안에 갇혀 폐쇄된 생활을 해야만 했다.
제주 사람들이 오랜 세월 섬 안에 갇혀 살면서 제주도가 '여다(女多)의 섬'이 되고, 해녀가 그 모진 삶을 이어가게 된 배경에는 이러한 사연이 있었다.
미술평론가이자 제주문화연구소장인 김유정 씨는 자신의 저서 '제주 해양문화 읽기'를 통해 "포작인은 제주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생산자였다"며 "제주 해양 문화를 이해할 때 포작인을 외면한다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해녀의 역사도, 지배계급의 숱한 착취의 역사도 바로 보지 못하고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가혹한 착취와 학대 속에 살아야 했던 포작인들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다시 조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
제주 역사 중요한 생산자…포작인의 삶 재조명 필요
제주 해녀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된 지 4년이 흘렀다.
그동안 해녀를 통해 제주 여성의 강인한 생명력과 독립성, 자연과의 공존을 추구하는 정신 등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
하지만 해녀와 함께 제주 바다에서 힘겹게 삶을 이어온 '포작인'(浦作人)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드물다.
제주의 해양문화와 해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포작인들의 파란만장한 삶의 역사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 해녀의 원조 포작인
과거 제주 사람들이 삶을 이어갔던 방편은 목축업과 농업, 어업이 대부분이었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중산간 오름 지대에서 사람들은 말과 소를 방목해 키웠다.
또 중산간에서 해안에 이르는 마을에선 사람들이 밭농사를, 해안 마을에서는 해산물을 주로 채취했다.
화산섬 제주에선 토양과 기후 등 농사짓기에 적합하지 않은 척박한 자연환경과 섬이란 특성 탓에 해산물을 채취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일까.
제주 사람들은 삶의 터전이자 각종 먹을거리를 주는 바다를 '바당밭'(바다밭)이라고 불렀다.
이 바당밭에서 어업에 종사했던 사람들이 포작인과 해녀다.
포작인은 조선시대 제주에서 어업에 종사하는 남성을 통칭한다.
제주어로 '보재기'라고 했는데, 전복을 캐거나 배를 타고 나가 고기를 잡고, 해산물을 채취해 진상하는 역할을 했다.
훗날 해녀와 구분하기 위해 편의상 해남이라 불렸다.
포작인은 해녀의 원조였다.
사람들은 해녀 이전에 포작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전복을 캐려면 수심 20m 깊은 바닷속까지도 잠수해 들어가야 하는 등 당시 사람들은 이 일을 험한 일로 여겨 여자들이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해녀는 보통 해안가에서 전복이 아닌 미역을 땄다.
실제로 역사서에서도 포작인이란 용어는 해녀보다 먼저 등장했다.
문헌에는 조선 전기인 성종조(1457∼1494년)에 포작인이라는 말이 나타났고, 현재의 해녀를 지칭하는 '잠녀'라는 말은 조선 중기에 들어 등장한다.
사실, 해녀의 원래 이름은 잠녀였다.
말 그대로 잠수하는 여성이란 뜻으로, 일제 강점기를 기점으로 오늘날 해녀라는 말로 대체됐다.
◇ '죽음의 고통' 포작인의 삶
「지아비는 포작과 선원 노릇을 겸하는 등 힘든 일이 허다하며, 지어미는 잠녀로 생활하면서 일 년 내내 미역과 전복을 마련해 바쳐야 하니 그 고역이 목자의 10배나 됩니다.
일년을 통틀어 합산하면 남자가 포작으로 바치는 것이 20여필, 여자가 바치는 것도 7∼8필에 이르니 부부가 바치는 것이 30여필에 달합니다.
」
조선 숙종 때 제주목사를 지낸 이형상(1653∼1733)은 조정에 장계를 올려 포작인과 잠녀의 어려움을 이처럼 알렸다.
포작인은 단순히 조정에 진상할 전복이나 해산물만 채취한 것은 아니었다.
진상선 등 당시 목숨을 건 뱃일 요역(조선시대 백성에게 대가 없이 부과하던 일)에 동원됐다.
조선시대 제주 사람들이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어했던 '6고역'(六苦役)이 있었는데 이는 진상을 위해 전복을 캐 올리는 포작역(鮑作役), 해조류를 채취했던 잠녀역(潛女役), 말을 기르던 목자역(牧子役, 말테우리), 귤을 재배하던 과원역(果員役), 진상품을 운반하는 배의 선원 역할을 하는 선격역(船格役, 곁꾼), 관청의 땅을 경작해주던 답한역(畓漢役) 등 6가지다.
포작인은 이 가운데 포작역과 선격역 등 이중의 고역을 떠안아야 했다.
심지어 왜구의 침략이 있을 때 수군(水軍)으로 동원되기도 하면서 풍랑을 만나 익사하거나 왜구의 칼에 죽임을 당하는 등 언제나 생사의 갈림길에 섰다.
조정에 바쳐야 할 진상품 부담이 너무나 과중했고, 중간에서 가로채는 관리들의 수탈이 심해지자 견디다 못해 다른 지역으로 도망가거나 바다에 떠돌면서 유랑하는 포작인도 많았다.
포작인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대신 그 역할을 해녀들이 짊어져야 했다.
진상해야 할 전복의 수가 많아 할당량을 채워야 했기 때문이다.
악순환은 반복됐다.
제주 여인들은 포작인의 아내가 되는 것을 기피했고, 결국 포작인들은 홀아비로 평생을 외롭게 살아야 했다.
옛날 제주 사람들은 남자아이 낳기를 꺼렸고 대신 딸을 낳길 원했다고 한다.
부모들은 딸을 낳으면 '이 애는 커서 나에게 잘 효도할 아이'라고 하며 기뻐하였지만, 아들을 낳으면 '이 애는 내 자식이 아니고 곧 바다 고래의 먹이가 될 것'이라 한탄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부(1454∼1504)의 표해록(漂海錄)에 전해져 오는 내용이다.
결국 인구이탈을 막기 위해 조선은 인조 7년인 1629년 제주에 출륙금지령을 내리는 강력한 통제정책을 폈다.
국법으로 관청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다른 지역으로 나갈 수 없도록 막아놨고, 제주 사람들은 200년 가까이 섬 안에 갇혀 폐쇄된 생활을 해야만 했다.
제주 사람들이 오랜 세월 섬 안에 갇혀 살면서 제주도가 '여다(女多)의 섬'이 되고, 해녀가 그 모진 삶을 이어가게 된 배경에는 이러한 사연이 있었다.
미술평론가이자 제주문화연구소장인 김유정 씨는 자신의 저서 '제주 해양문화 읽기'를 통해 "포작인은 제주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생산자였다"며 "제주 해양 문화를 이해할 때 포작인을 외면한다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해녀의 역사도, 지배계급의 숱한 착취의 역사도 바로 보지 못하고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가혹한 착취와 학대 속에 살아야 했던 포작인들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다시 조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