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프'는 현대문학 거장의 미발표 원고를 평생 부여잡고 살아온 78세 노파 에바 호프의 삶의 무게를 담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가 낸 원고 반환소송에 휘말린 그가 왜 이 원고에 집착하게 됐는지를 차근차근 풀어간다.
무대는 남루한 옷차림에 한동안 씻지 않은 듯 얼룩진 얼굴과 산발한 머리를 한 호프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법정에서 자신에게 질문하는 검사에게 '칵 퉤'하고 침을 뱉는 호프의 모습은 누가 봐도 괴팍한 노인이다.
"이 원고가 나야"라고 고집스럽게 외치는 호프. 그는 원고가 가진 예술적 가치나 금전적 보상을 탐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원고는 호프의 인생에 매 순간 걸림돌이었다.
원고에 집착하느라 어린 시절의 자신을 돌봐주지 않았던 엄마, 나치의 홀로코스트 속 원고를 지키기 위해 팔아버린 양심, 원고 때문에 자신을 배신하고 떠나버린 남자. 호프가 겪어온 일련의 일들이 회상 장면으로 지나간다.
호프는 한때 자신의 삶을 얽매는 원고로부터 도망치려고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원고에 광기에 가까운 집착을 보이게 된다.
과거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와 똑 닮은 모습이다.
모녀는 왜 원고에 집착하게 됐을까.
이는 '호프'의 시작과 끝을 맺는 질문이다.
답을 찾는 관객들은 모녀를 통해 상처받은 인간 내면의 연약함을 들여다보게 된다.
엄마 마리는 2차 세계대전으로 삶이 벼랑 끝에 다다르자 연인과의 약속으로 맡게 된 원고만 지켜내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일종의 자기 신념에 빠진 인물이다.
호프 역시 마찬가지다.
엄마의 모습을 경멸했지만, 어느새 원고와 자신의 존재 가치를 동일시하게 된다.
이들은 힘겨운 삶을 버티게 해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원고에 대한 집착은 한편으로는 삶에 대한 의지이기도 하다.
다만 주객이 전도돼 삶의 의미를 잃고 방황했을 뿐이다.
관객들은 호프의 모습을 보면서 상처받았던 자신들의 삶을 떠올리고 공감한다.
또 원고를 반환하라는 법원의 판결을 계기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려는 호프를 응원하면서 용기를 얻고 위로를 받는다.
뮤지컬은 소설 '변신'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의 친필 원고를 둘러싼 유작 반환 소송 실화를 모티브로 했다.
카프카는 자신의 작품을 태워 없애달라는 유언을 친구이자 작가인 막스 브로트에게 남긴다.
하지만 브로트는 카프카의 원고들을 출간하는 한편 비서인 에스더 호페에게 원고를 넘긴다.
이후 호페의 딸들에게 유산으로 남겨진 원고는 뮤지컬의 결말과 마찬가지로 소송 끝에 국가 소유로 넘어가게 된다.
'호프'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인간 내면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면서 보편적인 삶의 의미를 끌어낸다.
화려한 의상이나 무대장치, 특수효과 없이 단출한 무대에서 인터미션(쉬는시간) 없이 110분 동안 관객에게 진심을 전한다.
지난해 1월 초연 이후 국내 양대 뮤지컬 시상식인 예그린뮤지컬어워드와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11개 부문 수상을 기록하며 작품성도 인정받았다.
그동안 뮤지컬 분야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나이 든 여성의 서사를 다뤘다는 점도 높게 평가받았다.
공연은 내년 2월 7일까지 서울 종로구 연지동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진행된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