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번째 장편 영화 '후쿠오카'

제문(윤제문 분)은 헌책방 단골손님 소담(박소담 분)의 뜬금없는 제안에 함께 후쿠오카로 향한다.

그곳에는 28년 전 '순이'를 동시에 사랑했던 해효(권해효 분)가 작은 술집을 운영 중이다.

후쿠오카는 순이의 고향이고, 제문이 하는 헌책방도 사실 순이가 좋아했던 곳이다.

28년 전 일로 여전히 앙금이 남아 투덕거리는 해효와 제문을 소담은 재밌다는 듯, 한심하다는 듯 바라본다.

세 사람의 여행은 꿈인 듯 상상인 듯 이어진다.

장률 감독 "알다가도 모르겠는 게 사랑이고 그게 현실이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재확산으로 21일 시사회가 취소되고 소규모로 취재진과 만난 장률 감독은 열두번째 장편 '후쿠오카'를 사랑 영화라고 소개했다.

장 감독은 "남녀의 사랑이 이뤄져 행복하게 사는 것도 사랑의 하나지만, 대부분 이뤄지지 않는 것도, 사랑을 넘어 증오로 세월을 보내는 것도 다 사랑"이라며 "이걸 우리 삶에서 어떻게 대하고 소화해 내야 하는가가 큰 사랑의 주제"라고 말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혼란스러울 수 있다.

후쿠오카에 간 소담은 일본 사람에게 한국말을 하지만 일본 사람은 그 말을 알아듣고 일본어로 답한다.

일본어를 모른다는 소담도 상대의 말을 이해한다.

해효는 서점 주인 할아버지를 분명 며칠 전에 봤는데 서점을 물려받은 손녀는 할아버지가 몇 년 전 돌아가셨다고 말하고, 처음 일본에 온 소담에게는 얼마 전 두고 가지 않았느냐며 인형을 건네준다.

누군가의 꿈일 수도, 상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그제야 수긍이 가는 설정들이다.

장률 감독 "알다가도 모르겠는 게 사랑이고 그게 현실이죠"
"현실은 어떤 영화보다 모호하고, 사랑은 알다가도 모르겠는 거잖아요.

보통 영화에서 어떤 캐릭터가 정해지면 그걸 쫓아가는데 사실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영화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도 서로의 착각일 수 있죠. 저는 어렵게 말하는 걸 싫어하고, 솔직하게 현실을 얘기해요.

"
장 감독은 중국 옌볜에서 태어난 재중 동포 2세다.

중문학 교수에 소설가 출신이라는 독특한 이력으로 마흔 살에 영화감독으로 데뷔해 베네치아와 칸 영화제 등에서 인정받은 거장이다.

탈북자의 현실을 무섭도록 냉정하게 담았던 '두만강'(2011) 이후 한국으로 이주해 만든 '경주'(2014), '군산:거위를 노래하다'(2018) 등의 작품은 상대적으로 가벼워 보이기도 한다.

장 감독은 "공간이 바뀌어서 그런 것 같다"며 "2011년 강의 때문에 한국에 와서 살면서 삶이 변했다.

예전의 내 삶보다 폭이 많이 좁아졌는데, 현실의 삶이 좁아지니 상상을 많이 하게 된 것 같다"고 했다.

'후쿠오카'는 10년 넘게 장 감독의 영화를 꾸준히 소개해 왔던 후쿠오카 영화제와의 인연으로 시작된 작품이다.

도쿄와는 다른 개방적이고 정겨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고, 장 감독의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윤동주 시인도 중요한 연결고리다.

옌볜에서 태어나 평양과 서울에서 공부하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진 윤동주 시인은 장 감독 본인의 동선, 정체성과도 겹치다 보니 많은 생각을 안겨주는 도시일 수밖에 없다.

장률 감독 "알다가도 모르겠는 게 사랑이고 그게 현실이죠"
'경주'와 '군산'에 연달아 출연한 박해일에 이어 이번에는 박소담이 '군산'에 이어 두 번째로 장 감독의 영화에 함께했다.

장 감독은 "한번 작품을 같이 하고 저 친구가 궁금하다 싶으면 한 번 더 하게 된다"며 "박소담과도 기회가 있으면 또 같이하자고 했는데, 요즘은 예의상 하는 말이라는 걸 알지만, 예전에는 다 약속으로 생각했고 약속으로 밀어붙였다"며 웃었다.

제문이 '또라이'라고 부르는 소담은 극 중 21살이지만 교복을 입고 다닌다.

40대 후반 혹은 50대 초반인 두 남자와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불쑥 사라졌다 다시 불쑥 되돌아오고, 유치하게 싸우는 두 남자에게 가장 그럴듯한 말을 툭 던지기도 한다.

장 감독은 "보통 사람의 시선을 볼 때 이상하다 싶은 사람이 있는데, 어떤 인연으로 한동안 그 사람을 알게 되면 저 사람보다 내가 더 이상하구나, 내가 너무 눈치를 보는구나 싶을 때가 있다.

눈치를 잘 보지 않는 사람에게 눈길이 간다"고 했다.

"제 성장 과정에서 서점은 너무 중요한 공간이었고, 모든 생각과 감정을 그 공간에서 키웠어요.

서점에 자주 오는 사람들끼리는 동지감도 생기잖아요.

옛날 공간과 정서에 빠진 사람은 지금 세상과 소통에 문제가 있고, 제가 그래요.

피시방이 아닌 헌책방에 오는 젊은 사람이 그 사이를 이어주지 않을까 싶었죠."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