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시선] 이것은 정치 이야기가 아니다
홀로코스트의 전모가 드러나자 서구문명은 자기모멸에 빠져들었다. 부헨발트 유대인수용소를 연합군이 해방했을 때 현장을 지휘하던 아이젠하워 장군은 기자들을 불러 모든 것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찍게 했다. 인간으로서 부인하거나 의심할 수밖에는 없는 생지옥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젠하워는 인근에 살고 있던 독일인들에게도 그것을 다 보게 했다. 그들은 코를 틀어막으면서 그날 처음 그 지옥을 알게 된 사람들처럼 행동했다. 새빨간 거짓이었다. 수용소 굴뚝에서는 유대인들을 태우는 검은 연기가 날마다 피어올랐으며 악취는 수십 킬로미터 사방에 진동했다.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탈출했던 시인 파울 첼란이 시 ‘죽음의 푸가’에서 ‘새벽의 검은 젖’이라고 표현했던 가스실의 독가스를 그들이 모를 리 없었다.

거짓말쟁이는 독일인들만이 아니었다. 알 만한 사람들은 나치 강제수용소에 관해 다 알고 있었다. 1942년 영국 의회에서는 수용소에서 죽어가는 유대인들에 대한 묵념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연합군은 일단 전쟁에서 이기기에도 바빴고 대중은 관심이 없었다. 아이젠하워가 “우리는 전쟁을 하면서도 왜 전쟁을 해야 하는지 몰랐지만, 여기 와서 보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전쟁을 했는지는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 이유였다.

북한의 강제수용소들은 나치 유대인수용소에 절대 뒤지지 않는 지옥이다. 미군은 유대인수용소에서 유대인을 불태운 재를 거름으로 삼아 재배되고 있는 아름다운 양배추들을 보고는 충격에 빠졌더랬다. 북한 강제수용소에 사는 쥐들은 개만 하고 털에 기름기가 잘잘 흐른다. 수감자들의 시체를 뜯어먹기 때문이다. 그리고 뭔가를 사냥할 수 있는 힘이 아직 남아 있는 수감자들이 그 쥐를 잡아먹는다. 나치 유대인수용소에서는 어머니와 아들이 끌어안고 죽어갔지만, 북한 강제수용소는 아들이 어머니를 죽이게끔 만든 뒤 아들도 죽인다.

나치는 언어를 ‘악용’했다. 1942년 1월 20일 베를린 반제빌라에서 5인의 나치 고위급들은 유대종족 전체의 몰살을 ‘최종적 해결’이라는 학술적 용어로 대체했다. 나는 ‘북한 인권문제’라는 용어가 ‘최종적 해결’이라는 말처럼 타락했다고 본다. 북한 인권문제라는 두루뭉술해져 버린 말이 북한 강제수용소를 담요로 덮어버리는 까닭이다. 북한 강제수용소는 북한 인권문제의 핵심이며, 북한 인권문제를 입에 올리는 사람들이 북한 강제수용소를 ‘정확하게’ 문제 삼지 않을 때 북한 인권문제라는 용어는 나치의 용어가 되어 남한 사람들의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북한 인권문제’를 ‘북한 강제수용소문제’로 바꿔 부르기를 제안한다. 이것은 정치 이야기가 아니다. 파울 첼란은 1970년 센 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후유증, ‘나만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의식’과 ‘누군가 자신을 사냥하러 온다는 망상’ 때문이었다. 나는 궁금하다. 5·18 광주학살과 남영동 고문실에 분노하던 그 사람들은 대체 다 어디로 갔는가? 왜 우리는 얼마 떨어져 있지도 않은 곳에서 저런 무간지옥을 견디고 있는 동포들에게 마치 유대인수용소 근처에 살고 있던 그 독일인들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일까?

고통스러웠던 것은 시인 파울 첼란만이 아니었다. 인간은 아우슈비츠 이후 아직도 인간에 대한 절망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정말로 두려운 것은 자살이 아니라, 북한의 강제수용소가 바로 우리 눈과 코앞에서 전모를 드러낸 어느 날, 괴로워할 양심마저 없을지 모르는 우리들의 그런 사회 그런 나라이다. 언젠가 나는 한 청년의 얼굴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내 가족들은 북한의 강제수용소에서 다 죽었습니다. 모르지 않았잖아요. 당신은 작가라면서요. 그런데 왜 그때 우리들을 위해 단 한 줄도 쓰지 않았던 겁니까?” 이런 질문에 대한 알리바이로 이 글을 쓴 나는 비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