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 재정정책과 정책공조로 극복 중
코로나 이후 정책 전환이 리스크 요인
하지만 불안한 랠리다. 바이오와 모바일 등 일부 산업을 제외한 주요 기업들의 실적이 저조하고, 미국과 유럽에서는 사상 최악의 2분기 경제 성장률 성적표가 들려온다. 실물경제 회복은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퇴치만큼이나 어려운 가운데 유동성만 흘러 넘치는 상황이다.
결국 주식과 부동산 등 자산가치의 향방은 단기적으로 유동성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이 유동성과 관련해서는 최근 '함정'이라는 단어가 따라붙는다. 바로 유동성의 함정이다. 이 개념을 잘 살펴보면 유동성의 향방을 점칠 수 있다.
대공황 부른 유동성의 함정이란
유동성의 함정은 유명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그의 저서 <고용, 화폐, 이자에 관한 일반이론>에서 처음으로 밝힌 개념이다. 유동성은 현금을 말한다. 경기를 살리기 위해 정부와 은행이 아무리 돈을 풀어도 경기가 살아나지 않는 현상을 일컫는다.미래 경제 상황을 비관한 소비자들이 지갑을 열지 않고, 기업은 투자를 줄이면서 돈을 푸는데도 물가는 좀처럼 오르지 않는다. 대신 이같은 돈은 금융시장으로 흘러들며 일시적으로 자산 가격 상승을 이끌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오래가지 않는다. 아무리 돈을 쏟아부어도 경기가 살아나지 않으면 경기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이 높아져 소비와 투자가 위축되고 이는 결국 자산가격까지 끌어내린다. 이렇게 떨어지는 자산가격에 소비와 투자는 다시 줄어드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케인스는 '일반이론' 저술 당시 한창이던 미국의 대공황을 목도하며 이같은 개념을 창안했다. 하지만 유동성의 함정에 빠진 가장 적나라한 사례는 1990년대 이후 '잃어버린 20년'으로 정의되는 일본 경제다.
추락하는 경제성장률과 물가를 끌어올리기 위해 일본 중앙은행은 금리를 0% 수준까지 낮추며 돈을 풀었지만 경기를 살리는데 실패했다. 통화정책이 무력화된 가운데 일본은 디플레이션(물가하락에 따른 경기침체)의 나락에 빠져들었다.
한국은 유동성의 함정에 빠지고 있나
유동성의 함정은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기 힘들다는 점에서 국가는 물론 가계 경제에도 큰 재앙이다. 최근 발표되고 있는 몇가지 지표들은 한국 역시 유동성의 함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보여준다.다음은 김익환 한국경제신문 기자의 7월 28일자 기사다. "27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5월 말 국내 은행의 총예금 잔액은 작년 말에 비해 5.8%(87조9402억원) 늘어난 1603조4597억원에 달했다. 사상 처음 1600조원을 돌파했다.
1년 전 대비 증가율은 12.1%로 2011년 3월(12.3%) 후 가장 높았다. 가계·기업이 보유한 예금 등 현금성 자산의 증가 속도가 그만큼 빨라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평가다.
통장 잔액 대비 인출금 비율을 나타내는 은행의 요구불예금 회전율은 올해 5월 15.6회로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가계·기업의 현금 보유 성향이 강해지면서 돈이 생산·투자 활동에 쓰이지 못하고 통장에 묶여 있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돈을 풀었지만 이 돈이 투자와 소비로 이어지지 않고 예금에 묶여 있다는 뜻이다. 물론 풀린 돈의 상당 부분은 주식과 부동산으로도 몰렸다.
지난달 24일을 기준으로 주식 신용거래 잔액은 14조496억원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코로나19의 세계 확산이 일어나던 3월과 비교해서는 두배다. 올 상반기 주택 거래량도 62만건으로 작년 같은 기간 대비 두배 늘어났다.
하지만 경제 전반은 수렁에 빠지고 있다. 2분기 한국이 전분기 대비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3.3%로 시장 전망치를 하회했다. 1분기 -1.3%에 이어 2개 분기 연속 하락이다. 물가상승률도 3월부터 3개월 연속 마이너스(전월 대비)를 기록하다 6월에야 가까스로 0.2%의 미약한 상승세를 나타냈다.
그래도 그럭저럭 버틸 '코로나 시대'
사실 유동성의 함정은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세계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 당국자들은 여기에 빠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아울러 앞서 말했듯 이 개념 자체가 1930년대, 거시경제학이라는 학문 자체의 탄생과 역사를 같이하며 오랫동안 연구돼 왔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유동성의 함정 진입을 막을 것으로 기대되는 여러 가지 정책 솔루션들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정부가 직접 기업과 가계에 돈을 뿌리는 재정정책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가장 피부에 와닿을 수 있는 예가 지난 5월 지급된 재난지원금이다. 정부가 직접 국민들에게 17조원을 일시에 지급하며 소폭이나마 소비 관련 지표들이 상승세로 돌아섰다.
물론 부가가치 증가가 8조원(국회예산처 조사)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나는 등 비용 대비 효용은 높지 않다. 하지만 한국은행이 통화정책으로 유동성을 17조원 공급하는 것보다는 소비진작에 도움이 됐다.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코로나19 확산 이후 주요 국가 정부는 4조2000억달러를 재정정책을 통해 가계와 기업에 쏟아부었다. 이미 확정된 EU의 보조금 지급, 논의 중인 미국의 추가 경기부양책은 제외된 것이다. 세계 각국이 이같은 재정정책을 코로나 유행이 끝날 때까지 쏟아낸다면 유동성의 함정에는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물가와 성장률이 상승세로 전환할 때까지 계속 돈을 풀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는 것도 중요하다. 앞서 살펴봤듯 이같은 확신이 없다면 소비와 투자가 위축되며 디플레이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중앙은행(Fed)이 꾸준히 장기 채권을 사모으고 있는 것은 이같은 확신을 시장에 심어주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문제는 코로나 이후
코로나19 사태는 팬데믹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세계 모든 나라에 걸쳐 동시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만큼 특별한 공조 노력 없이도 모든 나라 정부와 중앙은행이 함께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쏟아내고 있다.하지만 문제는 코로나 이후다. 미국과 EU, 영국 등 일부 기축통화 국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는 정부 재정을 쏟아붓는데 한계가 있다. 중앙은행도 통화정책의 유효성을 되살리려면 점진적인 금리 인상이 불가피하다. 다음은 최인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의 말이다.
"돈을 푼 것은 분명히 안 푼 것보다 낫다. 코로나는 언젠가 없어질테니 일단 그 기간을 버티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병이 물러나는 시점에는 돈을 거둬들이고 자산 시장의 거품도 터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투자자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투자의 리스크로 작용했던 코로나가 종식되는 상황이 다시 리스크가 될 수 있다. 물론 코로나가 끝나고 기업 실적과 경기가 이전 수준으로 회복될 수도 있지만, 자산가격이 내려갈 수도 있다." 이미 여러 전망기관들은 코로나 이후 세계 경제 성장이 이전의 경로에서 벗어난 'L자'를 그릴 것이라는 예상을 내놓고 있다. 세계 경제가 더 이상 유동성이라는 스테로이드를 맞지 못하는 순간 코로나 이전보다 황폐화된 실물경제의 상황과 맞닥드리게 된다는 것이다.
넘치는 유동성에 주식과 부동산할 것 없이 오르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투자자의 눈을 흐리게 해 다가올 미래에 대비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또다른 의미의 '유동성의 함정'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