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미래 달렸다"며 '철의 수상' 지론 꺾고 정상들 설득
연임부담 털자 유로존 붕괴·EU 분열 방지에 모처럼 제역할
메르켈 살아있네…EU 회복기금 극적타결에 '통큰 리더십'
정계은퇴를 예고해 존재감이 사라져가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동유럽과 서유럽, 북유럽과 남유럽으로 사분오열된 유럽연합(EU)을 묶어내는 통합의 리더로 주목을 받았다.

회원국 정권들의 개별적인 성향과 각국 정부가 처한 서로 다른 재정 상황 때문에 교착상태에 빠진 경제회복기금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된 데 메르켈 총리의 기여도가 결정적이었다는 평가다.

EU 27개국 회원국 정상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따른 경기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한 7천500억 유로(약 1천30조원) 규모의 경제회복기금에 21일(현지시간) 합의했다.

이에 따라 EU 집행위원회는 높은 신용등급을 이용해 금융시장에서 돈을 빌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코로나19 피해가 큰 회원국에 지원할 계획이다.

기금 가운데 3천600억 유로(약 493조원)는 추후 상환해야 하는 대출금으로 제공된다.

나머지 3천900억 유로(약 534조원)는 지원받은 회원국이 갚을 필요가 없는 보조금으로 지원된다.

보조금은 이후 EU 차원에서 갚게 된다.

이번 합의 과정에선 부유한 북부 국가들이 자국 부담을 우려해 보조금 비중 축소를 주장하며 협상이 교착되기도 했다.

당초 이틀 일정이던 정상회의는 90시간이 넘도록 연장됐다.

메르켈 살아있네…EU 회복기금 극적타결에 '통큰 리더십'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메르켈 총리가 다른 정상들을 하나씩 설득하면서 접점을 찾을 수 없을 것으로 보이던 논의에 돌파구가 생겼다.

신문은 특히 메르켈 총리가 기금 구성에 극렬히 반대한 마르크 뤼테 네덜란드 총리의 동의를 얻어낸 게 교착국면의 돌파구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당시 메르켈 총리는 뤼테 총리에게 "유럽의 미래가 달려있다"며 "남부 국가들이 파산하면 결국 우리 모두 파산할 것"이라고 경고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합의 과정에서 드러난 메르켈 총리의 신속한 입장 변화 또한 주목을 받고 있다.

그간 메르켈 총리는 EU가 특정 회원국에 보조금을 지원하는 것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10여년 전 유로존 위기 당시 그는 빈국의 빚을 부유국이 부담해선 안 된다며 지원금이 보조금 대신 대출금 형태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원 대상국엔 복지 축소 등 가혹한 조건을 내세워 자국에서 '철의 수상'으로 불리기까지 했다.

메르켈 살아있네…EU 회복기금 극적타결에 '통큰 리더십'
이랬던 그가 이번 지론을 꺾어가며 합의를 유연하게 주도하게 된 것은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EU의 경제 위기가 그만큼 심각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EU는 회원국들의 올해 국내총생산(GDP)이 작년보다 9%까지 줄어들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를 고려하면 선호하지 않는 지원안을 지금 받아들이는 게 이후 유럽경제의 붕괴를 맞이하는 것보다 낫다는 현실적 판단이 힘을 얻은 것으로 관측된다.

코로나19 사태 속 EU 회원국 간 분열 양상이 드러난 점도 메르켈 총리가 합의에 적극적으로 나선 원인으로 지목된다.

EU 회원국들은 팬데믹 초기인 지난 3월에 확산을 막겠다며 국경을 폐쇄하고 의료 물자를 비축하며 서로 수출규제까지 가하는 분열을 노출했다.

이번 합의마저 끝내 무산되면 EU의 응집력이 약화하고 미래도 어두워질 것이라는 지적이 많았다.

메르켈 총리는 총리 연임의사가 없다는 점을 누차 밝히고 있다.

그가 연임의 부담에서 벗어난 점 역시 적극적으로 합의에 힘을 보탤 수 있는 토대로 주목받았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