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와 서구 전역은 분명 구강기로 후퇴하는 중"

21세기 들어서 세계적으로 눈에 띄는 현상은 남성성 상실이다.

자본주의 고도화에 따른 물질만능주의 부각, 소비시장 주도권을 쥔 여성의 자연스러운 권력 획득과 더불어, 오랫동안 우월적 지위를 누렸던 남성은 인류사 시작 이래 한 번도 경험 못 한 변화에 당혹해하고 있다.

무엇보다 의학적으로 남성 호르몬의 작용이 원시 시대와 달라진 게 없는 상황에서 사회적으로 급변한 성 역할은 남성들이 자신의 '리비도(본능적 성 충동)'가 적절한 것인지 의심하게 되는 근본적 문제의식을 불렀다.

이런 현상은 '초식남'으로 불리는 남성들의 연애·결혼 기피와 사회 부적응, 그 반대급부로서 여성 혐오, 동성애자 증가 등을 부른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세계 3대 문학상인 공쿠르상 수상 작가 미셸 우엘벡의 소설 '세로토닌'(문학동네 펴냄)의 주인공도 이처럼 리비도를 잃어가는 현대 중년 남성의 이야기다.

40대 후반인 주인공 라브루스트는 농업 전문가로서 고액 연봉을 받는 프랑스 농업부 위촉직 공무원이다.

그는 여성과의 성관계를 즐기지만, 결혼은 하지 않고 일본인 여성과 동거 중이다.

주인공은 지독한 권태와 우울감에 시달리는데, 사실 그의 나이에 이런 현상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남성 호르몬 감소는 성 능력 감퇴 외에도 자연스럽게 권태와 우울감, 무력감을 부르기 때문이다.

작가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호르몬의 이름을 제목으로 정한 것도 우연은 아닌 듯해 보인다.

리비도를 잃은 남자의 고독…우엘벡 소설 '세로토닌'

마침 이 무렵 주인공은 일본인 애인의 '난교 비디오'를 보고서 '자발적 실종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직장과 집, 인간관계, 각종 기록 등을 정리하고 파리 외곽 한 호텔 방으로 사라진다.

그는 비디오 화면 속에서 애인과 함께 나오는 수많은 남성 성기들을 보면서 무력감과 우울함을 느낀다.

호텔에 고립된 주인공은 우울감을 극복하고자 '행복 호르몬' 세로토닌 분비를 촉진하는 항우울제를 복용한다.

하지만 이 약은 발기 부전과 '리비도 상실'이라는 큰 부작용이 있다.

이제 그의 성생활은 종말을 맞게 됐고 남성으로서의 자아와도 이별하게 된다.

그는 남성으로서 종말을 고하는 순간 이상하게도 옛 애인들과 추억이 떠오르자 그들을 찾아간다.

"나의 리비도와의 영원한 작별을,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최근 들어 기능 종료 조짐이 뚜렷해진 나의 페니스와의 영원한 작별을 기념하는 작은 의식을 거행하려 했던 것 같다.

요컨대 나는 나의 페니스를 떠받들어주고 나름의 방식으로 사랑해줬던 여자들을 죄다 다시 만나보고 싶었던 것이다.

"
주인공 라브루스트는 사실 세계 어디에나 있는 40대 후반 남성이다.

그들은 사랑에 실패하고 냉소적인데다, 리비도와 남성 특유의 공격성마저 무장 해제된 채 두려움에 떤다.

주인공은 옛 애인의 주변을 맴돌며 다시 행복을 꿈꾸지만 결국 파리로 돌아가 끝없는 고독을 마주하며 천천히 죽음을 기다린다.

작가 우엘벡은 주인공의 입을 빌려 서구 사회가 병들어가고 있음을 지적하고 남성성의 퇴조와 리비도의 퇴장에 아쉬움을 표한다.

한때 비판받았다가 최근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천재 지그문트 프로이트에게도 냉소적으로 공감을 드러낸다.

"그동안 요리 프로그램들이 굉장한 비중으로 증가했고, 그러는 동안 에로물은 대부분 채널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 우스꽝스러운 오스트리아인의 용어를 빌리자면, 프랑스와 어쩌면 서구 전역은 분명 구강기로 후퇴하는 중이었다.

나도 같은 길을 걷고 있었고,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
이슬람을 비판할 권리를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등 작가와 문학의 '성역 없는' 언론 자유를 주장하고 교조주의에 반대해온 우엘벡 다운 말이다.

한편 이 소설에서 목축업자들이 정부 유제품 쿼터 정책에 반대하고자 총기 시위를 벌인 장면은 2018년 마크롱 정부의 유류세 인상 정책에 반대하는 '노란 조끼 운동'을 예견한 것으로 회자하며 한때 화제가 됐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