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 장애' 흑인 여성 변호사 하벤 길마 자서전 출간

"곰과 마주쳤을 때, 무서워 뛰어 도망간다고 곰이 사라지는 게 아니지요.

오히려 곰이 계속 쫓아온다고 해요.

만일 제가 제 입장을 분명히 하고 맞서지 않았다면 그 메뉴 문제가 대학 4년 내내 따라다녔을 거예요.

"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미국의 '이중 장애' 흑인 여성 하벤 길마(32)는 대학생 시절 장애인 권리 실현을 위한 투쟁에서 '작은 성공'을 거둔 후 느낀 심정을 이렇게 적었다.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자서전 '하벤 길마'(Haben Girma·알파미디어)에서다.

장애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전 과목 A 학점을 받고 전액 장학생으로 오리건 주 루이스 앤 클라크 대학에 입학한 하벤은 교내 식당 '본 아페티'에서 큰 좌절을 겪게 된다.

조용한 곳에서 높은 주파수로 이야기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간신히 들을 수 있었으나 소음이 많은 식당에서는 누군가 메뉴가 무엇인지 이야기해 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식당 책임자는 고충을 하소연하는 하벤에게 메뉴가 정해지는 대로 이메일로 알려주기로 했으나 식당 종업원들이 보내주는 메일은 제때 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항의하면 "바빠서"라는 대답이 돌아오기 일쑤였다.

장애의 벽 뛰어넘은 '21세기 헬렌 켈러'
장애인 관련 법령을 꼼꼼히 살펴본 하벤은 자신에게 이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식당 책임자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건 제가 본 아페티에 어떤 편의나 호의를 요구하는 게 아니라 다만 법에 따라 조치를 취해 달라는 요청임을 부디 이해해 주셨으면 해요.

미국 장애인법 제3장에 따르면, 본 아페티처럼 대중을 수용하는 장소에서는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금지돼 있더군요.

만일 본 아페티가 메뉴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제 요구를 계속 거절하신다면 저로서는 법적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군요.

"
다음날 식당에서 만난 책임자는 '서비스'로 초콜릿 쿠키를 내밀면서 앞으로는 제때, 빠짐없이 메뉴를 이메일로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 대학의 유일한 시각장애인이었던 하벤의 투쟁이 성과를 거둠에 따라 그 뒤 입학한 장애 학생들도 같은 혜택을 누린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벤의 어머니는 아프리카 동북부의 작은 나라 에리트레아 출신이다.

에리트레아가 에티오피아의 일부였을 때 에티오피아의 탄압을 피해 한때 수단에서 난민 생활을 했다.

아버지는 에티오피아에서 태어났지만, 혈통은 에리트레아 쪽이었다.

각자 미국에 이민한 두 사람은 결혼해서 캘리포니아에 정착했고 거기서 하벤을 비롯한 자녀들을 낳았다.

가난하지만 화목한 가정의 품 안에서 하벤은 줏대 있는 아이로 성장해갔다.

수업 중 교사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점자 변환 기능이 있는 컴퓨터에 의지해 열심히 공부했고 우등을 놓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봉사 동아리 회원으로 아프리카 말리의 집짓기 봉사활동에 참가하기도 하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루이지애나주 장애인 지원센터에서 직업교육을 받을 때는 막대기에 의지해 시내를 돌아다니다 기차에 치여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도 겪었다.

그러면서 점차 자신감과 독립심을 키워간 하벤은 루이스 앤 클라크 대학에서 겪은 일을 계기로 장애인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이 일에 인생을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로스쿨 진학을 결심한다.

장애의 벽 뛰어넘은 '21세기 헬렌 켈러'
역시 성적은 최우등이어서 걱정할 일이 없었지만, 로스쿨 측에서 자신의 장애를 어떻게 바라볼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합격 통보를 보내온 여러 로스쿨 가운데 놀랍게도 하버드 대학이 있었다.

하버드 대학은 미국 최고의 명문 대학이라는 점 이외에 다른 측면에서도 하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바로 100여년 전 하벤과 같은 이중 장애인이었던 헬렌 켈러의 입학을 거부한 것이 하버드이기 때문이다.

헬렌 켈러가 이루지 못한 꿈을 100년이 지나 아프리카 난민 출신 이민자의 딸이 실현한 것이다.

하버드대 로스쿨 최초의 이중장애인인 하벤을 위해 학교 측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장학금과 학자금 융자 등 재정 지원은 물론 수화 통역사 2명을 고용해 수업 시간에 교수의 말을 전달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동료 학생들도 수업이 끝나면 수업 내용을 적은 노트를 장애 지원 사무실을 통해 하벤에 전달하는 방법으로 도왔다.

이 모든 지원에도 불구하고 시험과 평가에서는 점자 시험지가 제공되고 스크린 리더와 점자 디스플레이를 갖춘 노트북으로 답안을 작성할 수 있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예외도 적용되지 않았다.

하벤은 로스쿨의 모드 과목을 다 통과했고 여러 차례 우등생으로 뽑혔으며 법학 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스캐든 펠로십'에 선발돼 자신이 추진하는 시각장애 학생 디지털 독서 서비스 사업을 위한 2년간의 재정 지원을 받았다.

하벤은 로스쿨 재학 중 친구와 함께 자신에게 특화된 맞춤형 소통수단을 개발하기도 했다.

블루투스 자판과 점자 컴퓨터가 연결된 이 시스템은 대화 상대자가 자판으로 하고 싶은 말을 치면 하벤의 컴퓨터 모니터에 점자로 표시되는 기능을 갖췄다.

하벤은 말을 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비록 한 번에 한 사람과만 대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단점이지만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그에게 이만한 소통 수단은 없었다.

이 대화 장치는 로스쿨 졸업 후 변호사로 활동하던 2015년 하벤이 백악관에서 열린 장애인법 25주년 기념행사에서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과 대화할 수 있게 해줬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은 자판으로 "우리는 당신이 보여준 리더십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신 부친께서도 자랑스럽게 여기실 겁니다"라고 친 뒤 하벤을 포옹했다.

하벤은 이 행사에서 참석자들에게 대통령과 부통령을 소개하는 역할을 맡았다.

하벤은 소개 연설에서 "저희 할머니 입장에서 보면 제가 하버드에서 학업을 성공적으로 마친 것이 비밀처럼 보였겠지만 여기 계신 모든 분은 장애를 지닌 사람이 마법에 의해 성공을 거두는 것이 아니라 미국, 그리고 많은 분의 노력으로 어렵게 쟁취한 미국 장애인법이 마련한 기회를 통해 성공을 거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겁니다"라고 역설해 큰 박수를 받았다.

장애의 벽 뛰어넘은 '21세기 헬렌 켈러'
졸업 후 소망하던 대로 장애인 인권 신장을 위한 활동에 주력한 하벤은 디지털 도서관 업체 스크리브드(Scribd)의 장애인 접근을 요구하는 소송에 원고 측 변호인단의 일원으로 참여해 승소하는 데 기여했다.

지금은 장애인 권리 상담, 글쓰기, 대중 연설 등 장애인 권리를 옹호하고 홍보하는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하벤의 이야기는 역경을 딛고 고귀한 뜻을 이룬 성공담의 전형이다.

그의 노력과 의지는 감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지만, 그의 성공을 가능하게 한 주변 사람들, 학교와 지역 사회, 법·제도와 국가 시스템도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윤희기 옮김. 448쪽. 1만6천원.
장애의 벽 뛰어넘은 '21세기 헬렌 켈러'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