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 못해 부끄럽다'던 5·18 최후항쟁 유공자 故 이연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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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식 마친 문재인 대통령 참배
문재인 대통령이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을 마치고 국립 5·18민주묘지를 찾아 참배한 고(故) 이연 씨는 5·18 최후항쟁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다.
민주화운동으로 수차례 투옥된 큰형 이강 씨의 영향을 받은 듯 이씨는 고등학생 때부터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군사 정권 아래 보수적이었던 학교에서는 그의 깨어있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결국 고교를 자퇴한 이씨는 검정고시를 거쳐 1980년 전남대학교에 입학했다.
엄혹했던 정치·사회적 분위기 속에 그의 대학 새내기 시절은 아름답지 못했다.
그해 5월 18일 비상계엄이 확대되자 이씨는 선배들과 함께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에 참여했다.
시민군과 총격전 끝에 광주 외곽으로 물러간 계엄군이 다시 진압작전을 펼 것이라는 소식에도 그는 항쟁 의지를 다졌다.
전남도청 인근에 있던 YWCA를 사수하는 역할을 맡은 그는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면 목숨이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27일 새벽, 어둠을 틈타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시작됐다.
그는 죽을 각오로 계엄군과 총격전을 벌였지만 가지고 있던 구형 총기의 노리쇠가 고장나면서 계엄군에게 붙잡혔다.
이때 17명이 숨지고 이씨와 함께 전남도청과 YWCA 등에서 200여명이 붙잡혔다.
이씨의 둘째 누나 이정 씨도 전남도청에서 취사반장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진압작전 직전 빠져나와 목숨을 구했다.
그는 곧바로 군부대로 끌려가 가혹한 구타를 당해야 했다.
특히 남민련 사건으로 구속돼 있던 큰형의 사주를 받은 것 아니냐며 유독 심한 가혹행위가 이뤄졌다.
그는 매일같이 끌려나가 혼절해 돌아왔다.
그러던 와중에도 다른 수감자들이 서로 먹을 것이 부족해 다투자 자신의 몫을 대신 전해주기도 했다고 그와 함께 수감됐던 이들은 전한다.
이씨 가족들은 최후 진압작전이 끝난 뒤에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은 그의 생사를 걱정했다.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건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백방으로 찾아다녔다.
하지만 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씨 아버지는 인맥을 총동원해 겨우 보안부대에 근무하는 사람과 연락이 닿았지만, 그는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렇게 두달여 동안 마음을 졸이다 가족들은 이씨가 재판에 넘겨진다는 한 장의 통지서를 받고서야 행방을 알게 됐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만약 이씨가 가혹한 행위를 견뎌내지 못하고 사망했더라면 영영 행방을 찾지 못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에 아찔하기만 하다.
5·18 당시 사라져 시신조차 찾지 못한 행방불명자는 공식 인정된 사람만 76명에 달한다.
재판을 받은 이씨는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출소했다.
하지만 그는 5·18 최후항쟁에서 숨진 동료들에 대한 죄책감에 평생을 힘들어했다고 가족들은 전했다.
출소한 뒤 '폭도'라는 낙인이 찍혀 학교를 더는 다니지 못하게 된 이씨는 다시 시험을 치러 서강대학교에 입학, 야학 활동 등을 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이후 서울에서 삶을 이어간 이씨는 58세가 되던 지난해 7월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 광주 북구 국립 5·18민주묘지 제2묘역에 안치됐다.
/연합뉴스
민주화운동으로 수차례 투옥된 큰형 이강 씨의 영향을 받은 듯 이씨는 고등학생 때부터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군사 정권 아래 보수적이었던 학교에서는 그의 깨어있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결국 고교를 자퇴한 이씨는 검정고시를 거쳐 1980년 전남대학교에 입학했다.
엄혹했던 정치·사회적 분위기 속에 그의 대학 새내기 시절은 아름답지 못했다.
그해 5월 18일 비상계엄이 확대되자 이씨는 선배들과 함께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에 참여했다.
시민군과 총격전 끝에 광주 외곽으로 물러간 계엄군이 다시 진압작전을 펼 것이라는 소식에도 그는 항쟁 의지를 다졌다.
전남도청 인근에 있던 YWCA를 사수하는 역할을 맡은 그는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면 목숨이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27일 새벽, 어둠을 틈타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시작됐다.
그는 죽을 각오로 계엄군과 총격전을 벌였지만 가지고 있던 구형 총기의 노리쇠가 고장나면서 계엄군에게 붙잡혔다.
이때 17명이 숨지고 이씨와 함께 전남도청과 YWCA 등에서 200여명이 붙잡혔다.
이씨의 둘째 누나 이정 씨도 전남도청에서 취사반장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진압작전 직전 빠져나와 목숨을 구했다.
그는 곧바로 군부대로 끌려가 가혹한 구타를 당해야 했다.
특히 남민련 사건으로 구속돼 있던 큰형의 사주를 받은 것 아니냐며 유독 심한 가혹행위가 이뤄졌다.
그는 매일같이 끌려나가 혼절해 돌아왔다.
그러던 와중에도 다른 수감자들이 서로 먹을 것이 부족해 다투자 자신의 몫을 대신 전해주기도 했다고 그와 함께 수감됐던 이들은 전한다.
이씨 가족들은 최후 진압작전이 끝난 뒤에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은 그의 생사를 걱정했다.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건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백방으로 찾아다녔다.
하지만 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씨 아버지는 인맥을 총동원해 겨우 보안부대에 근무하는 사람과 연락이 닿았지만, 그는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렇게 두달여 동안 마음을 졸이다 가족들은 이씨가 재판에 넘겨진다는 한 장의 통지서를 받고서야 행방을 알게 됐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만약 이씨가 가혹한 행위를 견뎌내지 못하고 사망했더라면 영영 행방을 찾지 못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에 아찔하기만 하다.
5·18 당시 사라져 시신조차 찾지 못한 행방불명자는 공식 인정된 사람만 76명에 달한다.
재판을 받은 이씨는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출소했다.
하지만 그는 5·18 최후항쟁에서 숨진 동료들에 대한 죄책감에 평생을 힘들어했다고 가족들은 전했다.
출소한 뒤 '폭도'라는 낙인이 찍혀 학교를 더는 다니지 못하게 된 이씨는 다시 시험을 치러 서강대학교에 입학, 야학 활동 등을 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이후 서울에서 삶을 이어간 이씨는 58세가 되던 지난해 7월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 광주 북구 국립 5·18민주묘지 제2묘역에 안치됐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