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전남도청복원추진단 "객관적 사실 기술한 의미있는 자료"
"사망자 261명" 외신 기자가 본 1980년 5월의 광주
1980년 5·18 민주화운동 현장에서 기사를 작성한 외신 기자의 원고에는 당시의 상황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옛 전남도청복원추진단은 12일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 별관 1층에서 미국 AP통신의 테리 앤더슨(Terry A. Anderson) 기자의 기사 원본 등을 전직 언론인에게 기증받아 일반에 공개했다.

이 자료는 앤더슨이 1980년 5월 22일부터 27일까지 광주를 취재하고 작성해 미국 본사로 송고한 원본 기사와 도쿄지국에서 송고한 것으로 추정되는 기사 등 13장, 해당 기사가 인용 보도된 신문 스크랩 8장이다.

앤더슨은 5월 26일 자 기사에서 "시민군 대변인은 시위로 인해 261명이 사망했고, 이 중 100여명의 시신은 신원 미상이라고 발표했다"고 말했다.

앤더슨이 언급한 시민군 대변인은 당시 그 역할을 맡은 윤상원 열사인 것으로 옛 전남도청복원추진단은 추정하고 있다.

당시 기자들이 '그렇게 많은 사망자는 보이지 않는다'고 묻자 시민군 대변인은 '가족들이 장례를 위해 시신을 데려가고, 하수구와 공터, 공사장에서 많은 시체가 발견됐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김도형 옛 전남도청복원추진단장은 "여전히 정확한 사망자 숫자가 집계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이 기사 내용은 상당한 의미가 있어 보인다"며 "진상규명조사위원회와 협조해 조사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 자료는 군사정권의 검열을 받지 않고 객관적으로 기술한 '때 묻지 않은' 소중한 자료"라고 덧붙였다.

"사망자 261명" 외신 기자가 본 1980년 5월의 광주
기사에 따르면 시민군은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며 미국의 중재를 요청하기도 했다.

퇴진해야 하는 당사자인 전두환 측과 협상을 할 수 없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당시 미 국무부는 "중재 가능성이 낮다"고 발표했다.

5월 26일 몇몇 가게들은 정상 운영을 하고 채소 장수들도 큰 문제 없이 군 검문소와 학생들이 설치한 바리케이드를 지나 도시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고 앤더슨은 계엄군의 최후 진압 전날의 광주 도심 풍경을 전했다.

계엄군이 외곽으로 물러나 있던 5월 23일 앤더슨은 시민들이 거리를 청소하고 곳곳에 있는 잔해와 불탄 차들을 치웠다는 내용도 기사에 포함했다.

당시 '광주 폭동'이라는 정부의 발표와는 정반대의 사실이 미국 기자에 의해 전해진 셈이다.

앤더슨은 "광주 시민들은 기자들과 담화에서 시위는 처음에 평화롭게 시작됐지만, 공수부대들이 18~19일 시위자들을 무자비하게 소총과 총검으로 진압하면서 격렬한 저항으로 변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특히 한국 정부가 공산주의자를 지칭하는 용어인 '불순분자'들이 시위를 부추겼다고 밝혔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이번 시위에 불순분자가 개입됐다는 확인은 되지 않았다"고 선을 그었다.

수년이 지나서야 5·18민주화운동이 '폭동'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지만, 앤더슨은 이미 1980년 5월 광주의 한복판에서 5·18민주화운동을 이렇게 정리했다.

"학생들은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 10·26 사태 이후 선포된 계엄령 해제와 새로운 군부 정치 지도자 전두환 장군의 퇴진을 요구하며 약속된 민주주의 개혁을 바로 세워달라고 말했다.

5월 18일 계엄령이 확대 시행되자 집회는 금지되었으며, 군부는 국회와 모든 정치적 행위들을 금지했다.

그러나 광주 학생들은 이에 맞서 거리로 나왔고, 군이 반정부 정치 지도자 중 한 명인 김대중을 체포하자 지난 수요일(21일) 20만 명의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
이 자료는 오는 16일부터 옛 전남도청 별관 2층 복원홍보전시관에서 볼 수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