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상장사들이 잇따라 주주배당, 자사주 매입 등 주주 친화대책을 중단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경기침체의 골이 깊어지면서 기업들의 현금흐름이 급격히 악화되고 있어서다. 항공, 호텔, 유통업계를 중심으로 생존의 갈림길에 서 있는 기업들로서는 한 푼의 현금이라도 확보해야 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불안한 美 기업들 "비상금 쌓자"…배당·자사주 매입 안한다
기업들 주주배당 포기 선언 잇따라

14일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미국 S&P500·미드캡400·스몰캡600 등 3개 지수에 편입된 1500개 상장사 중 175곳이 배당금, 자사주 매입 등 현금을 써야 하는 주주친화책을 당분간 포기하겠다고 공시했다. 주주친화책을 접은 상장사 상당수는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은 항공, 호텔, 유통기업이라고 WSJ는 분석했다.

델타항공은 자사주 매입을, 메리어트 인터내셔널은 상황이 나아질 때까지 주주들에게 배당금 지급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보잉과 포드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JP모간체이스는 자사주 매입을 중단한 데 이어 코로나19 여파에 따라 배당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주주들에게 통보했다. JP모간체이스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는 배당금을 지급했다.

미 기업들은 매출 감소에 따른 현금흐름 악화에 대응해 강력하고 신속하게 구조조정을 하고 있다. WSJ가 조사한 S&P 지수 편입기업 중 약 100곳이 직원을 일시해고(furlough)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이들 기업이 고용하고 있는 직원 수는 약 300만 명이다.

월가 전문가들은 기업들의 주주친화책 중단이 증시에 악재로 작용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기업들이 자사주 매입에 쓰는 돈이 미국 증시의 순매수 수요 중 상당 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기업들의 배당금 지급 중단에 따른 배당주 투자수요 위축도 예상된다.

1분기 어닝시즌 개막

미 증시는 1분기 어닝시즌에 들어갔다. JP모간체이스는 1분기에 28억7000만달러(약 3조4900억원)의 이익을 냈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9% 급감했다. 1분기 주당순이익(EPS)은 78센트로, 시장 추정치인 1달러84센트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어닝 쇼크(실적 충격) 수준이다. 코로나19에 따른 경기 침체로 높아진 채무 불이행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 1분기에만 68억달러(약 8조2600억원)의 충당금을 쌓은 여파다.

금융정보기업인 팩트셋은 S&P500지수 편입 기업들의 1분기 순이익이 10% 줄어든 것으로 추정했다. 골드만삭스는 S&P500지수 편입 기업들의 올해 순이익이 지난해보다 33% 줄어들 것으로 보고 있다.

시장에서는 기업들이 1분기 실적 발표와 함께 내놓을 이후 실적 전망치가 충격적인 수준이면 증시가 요동칠 가능성도 점치고 있다. WSJ에 따르면 약 300곳이 “코로나19로 불확실성이 커졌다”며 실적 전망치를 철회한 상태다.

기업들의 코로나19 극복 몸부림

미국 정부가 다음달 1일 ‘경제 정상화’ 의지를 내비치고, 기업들 역시 영업에 다시 돌입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항공사들은 기내 소독 강화 및 대면 서비스 축소를 통한 여객 수요 모으기를 준비하고 있다. 근로조건 개선도 진행 중이다. 도요타는 근로자 사이에 사회적 거리 두기를 전제로 한 미국 공장 재가동을, GM은 근로자 대상 신속 코로나19 검사를 계획하고 있다. 이에 대해 WSJ는 “기업의 활동 재개는 일부분에 한해 느리게 진행될 것”이라며 “봉쇄를 풀었다가 다시 코로나19의 감염 사례가 급증하면 더 큰 문제”라고 우려했다.

코로나19 이후 수요가 회복되기 전에 파산에 이르는 기업이 등장할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미국의 청바지 제조회사인 트루릴리전은 13일 파산을 신청했다. 코로나19로 유통망이 폐쇄되면서 실적이 악화된 점을 이유로 들었다. 생존을 위한 기업들의 다양한 자구책도 이어지고 있다. 미국 유나이티드항공, 델타항공은 항공 마일리지를 할인된 가격으로 카드회사 등에 선매각해 현금을 마련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