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민들 "기약 없는 조립주택 생활에 마음도 지쳐…집터만 보면 우울감도"
빚 위에 버티는 소상공인들 "보상받아 좋겠다는 얘기에 냉가슴만"
[강원산불 1년] "임시주택 너머로 꽃은 피는데…여전히 잔인한 4월"
강원 동해안 주민들에게 지독히도 잔인했던 4월이 다시 돌아왔다.

고성·속초, 강릉·동해, 인제 산림을 사정없이 할퀴고 지나간 화마는 점차 흔적을 잃어가고 있다.

1년 전 고성에서 속초로 넘어가던 불길의 한 가운데 있던 고성군 토성면 일대 산림은 절반 넘게 민둥산으로 변했다.

산등성이에 아슬하게 걸친 굴착기는 불탄 나무들을 무심하게 부러뜨려 뽑아냈고, 검게 그을렸던 숲은 벌거숭이로 변했다.

멀리 우뚝 솟은 설악산 앞의 검은 숲은 조용히 자신의 때를 기다리고 있다.

[강원산불 1년] "임시주택 너머로 꽃은 피는데…여전히 잔인한 4월"
멀리서 바라본 민둥산은 가까이 다가가자 감춰온 깊은 상처를 드러냈다.

한 걸음 내딛을수록 지난해 악몽이 또렷이 떠올랐고, 깊이 숨을 들여 마시면 탄 내음이 코끝을 맴도는 듯했다.

검은 숲으로 들어서자 옷과 신발에 그을음이 묻었다.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불탄 그루터기만 남은 숲은 1년 전 상처를 여태 간직하고 있다.

잘린 나무들은 켜켜이 쌓였고 숲의 잔해들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

그 속에서도 애써 스스로를 치유하는 숲의 생명력은 봄과 함께 피어난다.

질기게 살아남고자 검게 탄 껍질 위로 송진을 흘려낸 소나무, 밑동이 불에 탔음에도 다시 꽃망울을 터뜨려 벌·나비를 부르는 매화와 진달래는 잔인한 계절을 온몸으로 견뎌내고 있다.

[강원산불 1년] "임시주택 너머로 꽃은 피는데…여전히 잔인한 4월"
능선을 따라 시선을 아래로 향하자 흐드러진 봄꽃 사이로 산불 이재민의 임시 거처가 보였다.

잠시 머물러야 할 임시 주택이지만 아직 많은 이재민이 그곳에 머물러 있다.

"딸이 지어준 집은 홀라당 불타고, 여기(임시주택에) 머문 지 벌써 1년이오. 여긴 내 집이 아니야."
산불 피해지인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에서 50년 넘게 살아온 한두진(84)씨는 소실된 집 옆에 마련된 임시주택에서 달력 12장을 넘겼다.

한씨는 기자의 손을 이끌고 집터로 향했다.

82.6㎡(25평) 남짓한 주택은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다행히도 올겨울은 춥지 않아 잘 버텼다고 했다.

사람들의 도움도 고마웠다고 했다.

하지만 기약 없는 임시 거처 생활에 마음도 지쳤다고 했다.

그는 "아직 보상금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는데 다시 집을 지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며 "휑한 집터를 보면 우울해질 뿐"이라고 토로했다.

[강원산불 1년] "임시주택 너머로 꽃은 피는데…여전히 잔인한 4월"
강릉시 옥계면 이재민들은 1년 전 악몽 속에 농사 준비를 하고 있다.

'부지깽이도 바삐 날뛴다'는 농사철은 맞은 이곳 주민들은 산불로 민둥산이 된 야산 주변의 농경지에서 감자 씨를 넣거나 옥수수 파종 준비를 하는 등 바쁘게 하루를 보내고 있다.

지난해 4월 5일 새벽 2시 이웃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아내와 함께 집을 탈출했던 윤재선(75·옥계면 천남리)씨는 올해도 고추모를 키우고, 땅콩 종자를 싹 틔우는 등 농사 준비로 바쁘다.

그는 산불로부터 다행히 집은 지켰지만, 경운기 등 농사일에 필요한 농자재가 모두 불에 타는 바람에 요즘도 없어진 도구를 사러 다니는 등 불편을 겪고 있다.

윤씨는 "지난해 산불 생각을 하면 지긋지긋하다.

난리도 그런 난리가 어디 있느냐 "면서 "무슨 꿈을 꾼 것같이 아직도 믿겨 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강원산불 1년] "임시주택 너머로 꽃은 피는데…여전히 잔인한 4월"
이재민들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불길에 사라진 보금자리를 새로 마련하는 것이다.

주택 부지를 구한 사람은 다시 지었지만, 상당수 이재민은 임시 거주 시설에서 산불 1년을 맞고 있다.

옥계면 천남리의 경우 지난해 산불로 이재민 23가구가 발생했지만, 이 가운데 집을 짓거나 현재 짓고 있는 주민은 6가구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남의 땅에 있던 집이다 보니 새로 짓는 것이 어려 임시주택에 머물고 있다.

보금자리를 마련한 주민도 아직은 진입로 등이 제대로 개설되지 않아 임시거처에서 옮겨가지 못하고 있다.

이재민 김창진(75·옥계면 천남리)씨는 "이재민들의 꿈은 다시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라며 "지난해 산불로 사라진 자리에 집을 지었지만, 담당 공무원들이 바뀐 탓인지 아직 진입 도로가 개설되지 않아 비가 오면 통행이 불편하다"고 말했다.

1년 전 산불은 동해안 416가구의 삶을 송두리째 태웠지만 179채는 아직 첫 삽도 뜨지 못하고 있다.

[강원산불 1년] "임시주택 너머로 꽃은 피는데…여전히 잔인한 4월"
산불 피해 소상공인들 역시 재기의 몸부림을 치고 있지만, 점차 잊힌다는 생각에 힘을 잃고 있다.

"장관, 도지사 등 유명한 사람들이 들러 지원을 약속하고서 사진만 찍고 갔지 실질적인 도움은 1년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입니다.

"
속초시 장사동 진성폐차장에서 지게차로 차량을 옮기던 김재진(56)대표는 어려움을 묻는 기자의 말에 울화통을 터뜨렸다.

산불은 그의 폐차장을 덮쳐 350대가 넘는 차와 엔진 400여개, 지게차 6대, 압축기, 건물 3동 등을 모두 태웠다.

피해액은 28억원이 넘었다.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과 신용보증기금 관계자들은 불탄 폐차장을 찾아 아낌없는 지원을 약속했다.

하지만 창구에서의 대답은 달랐다.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는 자금이 급했다.

[강원산불 1년] "임시주택 너머로 꽃은 피는데…여전히 잔인한 4월"
그는 1년 동안 이리저리 대출을 끌어썼다.

저리 융자 외에 다른 지원은 없었다.

김 대표는 "1년 동안 주말도 없이 일하면서 이자 갚은 기억밖에 없다"며 "속사정도 모르는 사람들이 '보상 많이 받아 좋겠다'고 말하면 무척 속상하다"고 하소연했다.

이어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점 잊히는 것이 가장 무섭다"며 "제대로 된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소송밖에 다른 길이 없는데 빚 위에 또 빚을 얹을 생각을 하니 답답하다"고 토로했다.

산불 피해민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다시 집을 짓고, 씨를 뿌리고, 가게를 세우고 있다.

민둥산은 힘겹게 다시 초록으로 덮이고 있고, 집도 가게도 언젠가는 다시 일어설 것이다.

이들의 재기를 응원하듯 불탄 소나무 위로 노란 개나리가 수줍게 얼굴을 내밀었다.

[강원산불 1년] "임시주택 너머로 꽃은 피는데…여전히 잔인한 4월"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