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입양 남매 "부모님을 용서해요. 새롭게 인연을"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1979년 7월 4일생 정지희·1982년 2월 17일생 정경재씨 친가족 찾아
"부모님께 나쁜 마음은 없어요.
우리에게 더 나은 삶을 주었고 덕분에 우리가 지금의 우리가 될 수 있었으니까요"
7살과 4살 때 프랑스에 입양된 한인 정지희(41)와 정경재(38) 씨가 "마음 깊이 바라고 있는 것은 친부모와 다른 가족들을 알고 싶고, 그들을 만나 새롭게 인연을 맺고 싶다"고 소망을 전했다.
이들 남매는 "부모님을 용서해요.
다시 볼 수 있고, 마침내 우리 인생의 퍼즐에서 없어진 마지막 한 조각을 맞출 수 있게 될 거라는 희망을 놓지 않을 거예요.
사랑해요"라는 내용의 뿌리 찾기 사연을 최근 아동권리보장원에 보냈다.
26일 이 기관에 따르면 1979년 7월 4일생인 지희 씨와 3살 아래인 경재 씨는 1985년 6월 12일 낮 12시 30분 부산 동래구 온천3동 버스 터미널 맞은편 부산행 쪽에서 경찰에 의해 발견됐다.
6살과 3살 때 일이다.
부산 남광일시보호소에 맡겨졌고, 이듬해 2월 28일 서울 마포구의 홀트아동복지회로 인계됐다.
남광일시보호소에 남아있는 기록을 보면 남매는 당시 대구에서 살았다.
그 외 친부모 정보는 전혀 없으며 이들 또한 가족 인적 정보를 기억하지 못한다.
이들은 9월께 한국에 여행 올 때 친부모와 가족을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프랑스에 입양된 남매는 각각 '로헝스 키엥즐러', '실방'이라는 현지 이름으로 한 가정에서 살았다.
입양 가족 곁에서 부족함 없이 행복한 성장기를 보낸 키엥즐러 씨는 현재 호텔리어로, 실방 씨는 정보처리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
이들은 "잘 자랐음에도 항상 우리에게 삶을 주신 그분들, 친부모님을 알 필요가 있었고 찾고 싶었다"고 전했다.
키엥즐러 씨는 어렴풋이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우린 아파트 같은 곳에 살았던 거 같아요.
부모님 얼굴이 기억나요.
동생과 닮은 어머니의 아름다움과 내가 건물 계단에서 떨어져서 눈 뼈 부분이 찢어졌을 때 자주 나를 돌보던 아버지의 인자함을 기억합니다.
그 흉터는 아직도 남아있어요"
그는 건물 아래에 주차된 덤프트럭 근처의 공터에서 다른 애들하고 즐겁게 놀고 있을 때 부모님이 집에 들어오라고 우리를 부르던 기억이 가장 뇌리에 남아있다고 회상했다.
짧게 파마한 할머니의 모습, 언니 얼굴과 함께했던 몇몇 순간들, 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고 또 잠을 자던 곳과 바닥에 깔려있던 얇은 이불도 스쳐 지나간다고 했다.
키엥즐러 씨는 자신들을 버스 터미널에 두고 떠나던 아버지의 뒷모습과 다시 우리를 찾으러 돌아오기를 바라며 얌전하게 기다리던 당시를 아주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연합뉴스
우리에게 더 나은 삶을 주었고 덕분에 우리가 지금의 우리가 될 수 있었으니까요"
7살과 4살 때 프랑스에 입양된 한인 정지희(41)와 정경재(38) 씨가 "마음 깊이 바라고 있는 것은 친부모와 다른 가족들을 알고 싶고, 그들을 만나 새롭게 인연을 맺고 싶다"고 소망을 전했다.
이들 남매는 "부모님을 용서해요.
다시 볼 수 있고, 마침내 우리 인생의 퍼즐에서 없어진 마지막 한 조각을 맞출 수 있게 될 거라는 희망을 놓지 않을 거예요.
사랑해요"라는 내용의 뿌리 찾기 사연을 최근 아동권리보장원에 보냈다.
26일 이 기관에 따르면 1979년 7월 4일생인 지희 씨와 3살 아래인 경재 씨는 1985년 6월 12일 낮 12시 30분 부산 동래구 온천3동 버스 터미널 맞은편 부산행 쪽에서 경찰에 의해 발견됐다.
6살과 3살 때 일이다.
부산 남광일시보호소에 맡겨졌고, 이듬해 2월 28일 서울 마포구의 홀트아동복지회로 인계됐다.
남광일시보호소에 남아있는 기록을 보면 남매는 당시 대구에서 살았다.
그 외 친부모 정보는 전혀 없으며 이들 또한 가족 인적 정보를 기억하지 못한다.
이들은 9월께 한국에 여행 올 때 친부모와 가족을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프랑스에 입양된 남매는 각각 '로헝스 키엥즐러', '실방'이라는 현지 이름으로 한 가정에서 살았다.
입양 가족 곁에서 부족함 없이 행복한 성장기를 보낸 키엥즐러 씨는 현재 호텔리어로, 실방 씨는 정보처리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
이들은 "잘 자랐음에도 항상 우리에게 삶을 주신 그분들, 친부모님을 알 필요가 있었고 찾고 싶었다"고 전했다.
키엥즐러 씨는 어렴풋이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우린 아파트 같은 곳에 살았던 거 같아요.
부모님 얼굴이 기억나요.
동생과 닮은 어머니의 아름다움과 내가 건물 계단에서 떨어져서 눈 뼈 부분이 찢어졌을 때 자주 나를 돌보던 아버지의 인자함을 기억합니다.
그 흉터는 아직도 남아있어요"
그는 건물 아래에 주차된 덤프트럭 근처의 공터에서 다른 애들하고 즐겁게 놀고 있을 때 부모님이 집에 들어오라고 우리를 부르던 기억이 가장 뇌리에 남아있다고 회상했다.
짧게 파마한 할머니의 모습, 언니 얼굴과 함께했던 몇몇 순간들, 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고 또 잠을 자던 곳과 바닥에 깔려있던 얇은 이불도 스쳐 지나간다고 했다.
키엥즐러 씨는 자신들을 버스 터미널에 두고 떠나던 아버지의 뒷모습과 다시 우리를 찾으러 돌아오기를 바라며 얌전하게 기다리던 당시를 아주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