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후] 대학병원서 환자 생명 지키는 간호사 김은별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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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설 자리 없나 싶었지만…" 포기않고 도전 또 도전
국가고시 합격해 '열일' 중…"학교·병원 동료들 도움 덕분" 2009년 크리스마스이브는 5년 차 간호사 김은별(33) 씨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다.
11년 전 솜털 보송보송했던 그가 하나원(북한이탈주민이 입국한 뒤 사회적응 교육을 받는 기관) 밖 세상으로 첫발을 내디딘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은별 씨 가슴은 자신감으로 부풀었다.
하나원 성적이 10등 안에 꼬박꼬박 들었으니 뭔들 못하랴 싶었다.
그러나 기대가 실망으로 변하는 데는 몇 달이면 충분했다.
최근 연합뉴스 기자와 마주 앉은 그는 당시를 회상하다 한숨을 쉬었다.
"닥치는 대로 취직 면접을 봤는데 서류를 통과해도 면접만 보면 다 떨어지는 거예요.
사투리가 심했거든요.
이 땅에 내가 설 자리는 없나보다 싶었죠."
그러다 기회가 왔다.
집 근처 치킨집 아르바이트였다.
탈북민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사장님은 놀란 눈치였지만 은별 씨를 선뜻 받아줬다.
은별 씨는 그렇게 한국 사회의 일원이 됐다.
규칙적으로 일하며 안정을 찾자 "평생 아르바이트만 하고 살 순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싹 텄다.
간호사가 되고 싶었다.
은별 씨가 간호사를 꿈꾼 데는 사연이 있었다.
"원래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경찰이던 아버지와 선생님이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어요.
부유하진 않아도 모자람 없이 자랐죠. 그런데 아버지가 덜컥 위암에 걸리셨어요.
어머니도 간병에 매달리시면서 가세가 형편없이 기울었어요.
"
한국에 오기 전, 중국에 가면 아버지 병원비를 벌 수 있다는 말에 은별 씨는 19세에 국경을 넘었다.
허베이성(河北省) 스자좡(石家莊), 산둥성(山東省) 칭다오(靑島) 식당에서 온갖 궂은 일을 다 했다.
말이 안 통하니 주로 만두 빚기를 했다.
한 달 내내 일해서 손에 쥔 돈은 500∼600위안. 대부분을 북한 집으로 보냈다.
"그때 어찌나 만두를 많이 빚었는지 저 지금도 만두 되게 잘 빚어요.
(웃음) 1년 반쯤 지났을 때 집에 연락했더니 아버지 몸이 많이 좋아지셨대요.
그때부터 제 인생을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중국에선 불법체류자 신세이니 공부도 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북한에 다시 가고 싶진 않았죠. 한국에 가야겠다 싶었어요.
" 2009년 8월 14일 한국 땅을 밟은 은별 씨는 곧 하나원에 입소했다.
많은 탈북민 출신 선배들이 강의하러 왔다.
그중에서도 40대 간호조무사 선배의 강의가 콕 박혔었다.
고이 접어뒀던 '아버지처럼 아픈 누군가를 돌볼 수 있다면…' 이라는 생각이 되살아날 때쯤, 은별 씨는 간호조무사 학원에 등록했다.
치킨집 아르바이트와 공부를 병행하며 악착같이 자격증을 땄다.
자신감이 붙으니 공부에 더 욕심이 생겼다.
결국 전북 익산 원광보건대학교 간호학과에 합격했다.
한국에 온 지 2년도 채 안 됐을 때 일이었다.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해야 했어요.
장학금을 받아야 학비, 생활비를 댈 수 있었거든요.
고향에서 배웠던 것과 교과과정이 너무 달라서 힘들 때도 많았어요.
북한에서 못해본 파워포인트(PPT) 사용이나 '팀플'이 어찌나 낯설었는지 몰라요.
"
은별 씨는 피나는 노력으로 4년 대학 과정을 마쳤다.
국가고시도 한 번에 합격했다.
시험을 앞두고 석 달 간 매일 12시간씩 꼬박 공부한 결과였다.
경기도의 한 2차 병원에 취직해 2년 가까이 일하다 경기도 화성시 동탄한림대성심병원으로 이직한 게 2017년.
낯선 대학 생활, 어려운 공부, 노동강도가 높은 대학병원 생활을 버티게 해준 버팀목은 '많은 언니들'이었다.
"제가요,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말을 안 했어요.
입을 열면 다들 신기해하면서 저를 쳐다보는 게 싫어서요.
그런데 대학에서 만난 '만학도' 언니들이 손을 내밀어줬어요.
벽에 부딪힐 때면 멘토 교수님들도 잘하고 있다며 무한한 격려를 보내주셨고요.
무엇보다 한림대동탄성심병원 채용 면접을 볼 때가 생각나요.
간호부장님께서 탈북민인 저를 편견 없이 봐주시고, 엄마처럼 '어려운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 해주셨어요.
지금도 부장님께선 병원 복도에서 마주치면 수백 명 중에 제 얼굴을 알아봐 주세요.
" 은별 씨의 하루는 요즘도 바삐 돌아간다.
출근하면 신경외과 환자들의 상태를 파악하고, 짬짬이 의학용어를 복습한다.
아팠던 환자들이 툭툭 털고 퇴원하는 걸 볼 때면 10년 넘게 못 뵌 아버지를 쾌차시킨 것만 같아 마음이 짠하다고 했다.
그는 "처음에는 저를 써주는 것만으로 감사했다.
지금은 출근 자체가 재미있다.
간호사가 힘든 직업인 건 맞지만, 이 일을 버티지 못하면 다른 일을 하더라도 못 버틸 거라고 생각한다"라고 힘줘 말했다.
주말이면 가끔 탈북 청소년들을 위한 봉사활동도 한다.
옛 경험을 더듬어 그때 알았으면 좋았을 법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
그동안 언론 인터뷰를 사양하던 그가 용기를 낸 것도 이 아이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을 주기 위해서다.
혈혈단신으로 낯선 땅에 뿌리 내려 어느새 그 열매를 나누는 은별 씨. 노력을 멈춘 적 없었던 그에게 어떤 미래를 꿈꾸냐고 물었다.
"간호사라는 직업을 이어가겠죠? 한 가지 더 꿈이 있다면 정맥주사 부문에 전문성을 쌓는 거예요.
제가 주사를 잘 놓거든요.
(웃음) 그리고 30년쯤 뒤에는… 자그마한 요양병원을 세우고 싶어요.
저도 그땐 할머니가 돼 있을 것이고, 혹시 부모님이 한국에 오시게 된다면 제일 먼저 모시고 싶어서요.
한국에서 받은 것들을 앞으로 살면서 조금씩 나누고 싶습니다.
" /연합뉴스
국가고시 합격해 '열일' 중…"학교·병원 동료들 도움 덕분" 2009년 크리스마스이브는 5년 차 간호사 김은별(33) 씨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다.
11년 전 솜털 보송보송했던 그가 하나원(북한이탈주민이 입국한 뒤 사회적응 교육을 받는 기관) 밖 세상으로 첫발을 내디딘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은별 씨 가슴은 자신감으로 부풀었다.
하나원 성적이 10등 안에 꼬박꼬박 들었으니 뭔들 못하랴 싶었다.
그러나 기대가 실망으로 변하는 데는 몇 달이면 충분했다.
최근 연합뉴스 기자와 마주 앉은 그는 당시를 회상하다 한숨을 쉬었다.
"닥치는 대로 취직 면접을 봤는데 서류를 통과해도 면접만 보면 다 떨어지는 거예요.
사투리가 심했거든요.
이 땅에 내가 설 자리는 없나보다 싶었죠."
그러다 기회가 왔다.
집 근처 치킨집 아르바이트였다.
탈북민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사장님은 놀란 눈치였지만 은별 씨를 선뜻 받아줬다.
은별 씨는 그렇게 한국 사회의 일원이 됐다.
규칙적으로 일하며 안정을 찾자 "평생 아르바이트만 하고 살 순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싹 텄다.
간호사가 되고 싶었다.
은별 씨가 간호사를 꿈꾼 데는 사연이 있었다.
"원래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경찰이던 아버지와 선생님이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어요.
부유하진 않아도 모자람 없이 자랐죠. 그런데 아버지가 덜컥 위암에 걸리셨어요.
어머니도 간병에 매달리시면서 가세가 형편없이 기울었어요.
"
한국에 오기 전, 중국에 가면 아버지 병원비를 벌 수 있다는 말에 은별 씨는 19세에 국경을 넘었다.
허베이성(河北省) 스자좡(石家莊), 산둥성(山東省) 칭다오(靑島) 식당에서 온갖 궂은 일을 다 했다.
말이 안 통하니 주로 만두 빚기를 했다.
한 달 내내 일해서 손에 쥔 돈은 500∼600위안. 대부분을 북한 집으로 보냈다.
"그때 어찌나 만두를 많이 빚었는지 저 지금도 만두 되게 잘 빚어요.
(웃음) 1년 반쯤 지났을 때 집에 연락했더니 아버지 몸이 많이 좋아지셨대요.
그때부터 제 인생을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중국에선 불법체류자 신세이니 공부도 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북한에 다시 가고 싶진 않았죠. 한국에 가야겠다 싶었어요.
" 2009년 8월 14일 한국 땅을 밟은 은별 씨는 곧 하나원에 입소했다.
많은 탈북민 출신 선배들이 강의하러 왔다.
그중에서도 40대 간호조무사 선배의 강의가 콕 박혔었다.
고이 접어뒀던 '아버지처럼 아픈 누군가를 돌볼 수 있다면…' 이라는 생각이 되살아날 때쯤, 은별 씨는 간호조무사 학원에 등록했다.
치킨집 아르바이트와 공부를 병행하며 악착같이 자격증을 땄다.
자신감이 붙으니 공부에 더 욕심이 생겼다.
결국 전북 익산 원광보건대학교 간호학과에 합격했다.
한국에 온 지 2년도 채 안 됐을 때 일이었다.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해야 했어요.
장학금을 받아야 학비, 생활비를 댈 수 있었거든요.
고향에서 배웠던 것과 교과과정이 너무 달라서 힘들 때도 많았어요.
북한에서 못해본 파워포인트(PPT) 사용이나 '팀플'이 어찌나 낯설었는지 몰라요.
"
은별 씨는 피나는 노력으로 4년 대학 과정을 마쳤다.
국가고시도 한 번에 합격했다.
시험을 앞두고 석 달 간 매일 12시간씩 꼬박 공부한 결과였다.
경기도의 한 2차 병원에 취직해 2년 가까이 일하다 경기도 화성시 동탄한림대성심병원으로 이직한 게 2017년.
낯선 대학 생활, 어려운 공부, 노동강도가 높은 대학병원 생활을 버티게 해준 버팀목은 '많은 언니들'이었다.
"제가요,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말을 안 했어요.
입을 열면 다들 신기해하면서 저를 쳐다보는 게 싫어서요.
그런데 대학에서 만난 '만학도' 언니들이 손을 내밀어줬어요.
벽에 부딪힐 때면 멘토 교수님들도 잘하고 있다며 무한한 격려를 보내주셨고요.
무엇보다 한림대동탄성심병원 채용 면접을 볼 때가 생각나요.
간호부장님께서 탈북민인 저를 편견 없이 봐주시고, 엄마처럼 '어려운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 해주셨어요.
지금도 부장님께선 병원 복도에서 마주치면 수백 명 중에 제 얼굴을 알아봐 주세요.
" 은별 씨의 하루는 요즘도 바삐 돌아간다.
출근하면 신경외과 환자들의 상태를 파악하고, 짬짬이 의학용어를 복습한다.
아팠던 환자들이 툭툭 털고 퇴원하는 걸 볼 때면 10년 넘게 못 뵌 아버지를 쾌차시킨 것만 같아 마음이 짠하다고 했다.
그는 "처음에는 저를 써주는 것만으로 감사했다.
지금은 출근 자체가 재미있다.
간호사가 힘든 직업인 건 맞지만, 이 일을 버티지 못하면 다른 일을 하더라도 못 버틸 거라고 생각한다"라고 힘줘 말했다.
주말이면 가끔 탈북 청소년들을 위한 봉사활동도 한다.
옛 경험을 더듬어 그때 알았으면 좋았을 법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
그동안 언론 인터뷰를 사양하던 그가 용기를 낸 것도 이 아이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을 주기 위해서다.
혈혈단신으로 낯선 땅에 뿌리 내려 어느새 그 열매를 나누는 은별 씨. 노력을 멈춘 적 없었던 그에게 어떤 미래를 꿈꾸냐고 물었다.
"간호사라는 직업을 이어가겠죠? 한 가지 더 꿈이 있다면 정맥주사 부문에 전문성을 쌓는 거예요.
제가 주사를 잘 놓거든요.
(웃음) 그리고 30년쯤 뒤에는… 자그마한 요양병원을 세우고 싶어요.
저도 그땐 할머니가 돼 있을 것이고, 혹시 부모님이 한국에 오시게 된다면 제일 먼저 모시고 싶어서요.
한국에서 받은 것들을 앞으로 살면서 조금씩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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